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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ug 21. 2020

꼰대의 라떼는 씁쓸하다
/ 우드수탁

꼰대에 대하여

  ‘나 때는 말이야’ 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 면전에 던지고 싶은 말이 생긴다. ‘꼰대’.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고유 문장은 상대를 나약하고 열정 없는 사람으로,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요새는 ‘라떼는’이라는 유행어로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이 말은 왜 꼰대의 고유 문장이 된 걸까. 되짚어보면 꼰대들의 이런 ‘라떼는’이 발현되기 시작한 건 ‘3포 세대’, ‘취업난’, ‘YOLO’ 등의 단어가 뉴스 기사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그 때부터가 아닐까. 자신의 청년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청년들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에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꼰대들이 생각하기에 지금은 너무 살기 좋은 세상이다.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과 자유로움, 편리한 모바일,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지원, 주 5일제, 일개 막내사원까지 존중해야 하는 이 세상이 뭐가 힘들단 말인가.


  본인도 회사의 일개 막내 사원으로 수많은 꼰대들과 마주한다. ‘주 6일제’를 겪었다고 큰 소리치는 토요근로꼰대, 먼저 인사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철심꼰대, 주로 독방을 사용하며 요즘 친구들은 열정이 없다고 중얼거리는 독방꼰대 등 다양하다. 또 꼰대들은 사원들의 리액션에 민감해서 억지로 웃어 보이지만, 뒤에서는 동기들과 누가 누가 더 꼰대인가 대결하기 바쁘다. 하지만 집에 가면 회사의 꼰대들과 같은 세대를 지낸 부모님과 마주한다. 우리 부모님도 꼰대 세대다. 영화 ‘1987’과 ‘택시운전사’를 보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부모님을 향해서는 마냥 분노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어렸을 적 얘기를 들으며 자라서 그런지 어느 순간 ‘라떼는’을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청년 시기에 힘들었다. 궁핍한 환경, 부모님의 무관심, 만연한 폭력, 독재정권 아래에서 자라 왔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적인 발언을 듣고, 선배가 까라고 하면 당연히 까는 그런 세상을 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엄마, 어떻게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어?” “어떻게 아빠는 그걸 다 참았어?” 라고 묻게 된다. 그럼 “그 때는 다 그랬어” 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 말은 문득 내 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그들은 상처에 익숙해지고 무뎌진 사람들이다. 다 같은 사람이니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게 기분이 나쁘고, 모욕적이고,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 마음 속 울컥하는 그 무언가를 포기하고, 상처에 무뎌져 버린 것이다. 그 무언가를 포기하게 한 것이 내가 아니었을까? 이루고 싶었던 무엇인가에 도달했을까. 엄마, 아빠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 왔을까.


  꼰대의 ‘라떼는’의 뒷 면에는 굳은 살이 박혀 결국 돌이 되어버린 감성, 음소거 되어버린 자아가 있다. 자신의 욕구에 둔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우리의 ‘자신을 찾는 행보’에 공감하는 순간 지난 과거가 문득 허망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지도 몰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라떼를 커피 종류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라떼’에는 씁쓸한 뒷 맛이 날 것 같다. 무너지고 무뎌져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마음이 뒤에서 씁쓸한 맛을 내는 것이다. 굳이 찾아 마시진 않겠지만, 만약 그런 라떼가 나온다면 그냥 끝까지 마셔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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