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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23. 2020

용기만 있었다면 개그맨을 꿈꿨을지도 / 우드수탁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어렸을 적 앨범을 들여다 보면,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 많다. 머리는 가발을 썼다고 해도 믿음직한 뽀글 파마 머리에 싸구려 선글라스를 끼고 코에 힘을 넣어 돼지코를 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지금 코에 힘이 들어간 건 반사 신경의 작용인걸까) 다른 꼬마 애들처럼 이쁜 척, 브이V 이렇게 무난하게 찍을 법도 한데 하여간 다양하고 우스운 표정의 향연이다. 그 때부터였던 걸까. 이쁘다는 말보다 웃기다는 말이 더 기분 좋았던 건.


  남을 웃기는 내 모습이 맘에 든다고 확실히 느끼게 된 건 아마 중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일단 나는 여중이었다. 성별 구분이 사라진 평행 이론의 단면 같은 곳.(물론 철저하게 내 시각에서다). 여자가 정말 휴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달까. 그렇게 마음껏 우스꽝스러워 질 수 있는 환경에 놓여진 나는 개그를 연마했다. 여름에는 대야를 가져와 찬 물에 발을 담그고 수업을 듣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원더걸스 텔미를 추며 낄낄거리고, 입으로 진동 소리를 내 선생님을 교란시키기도 했다. 친구들이 웃고 일명 빵 터지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가끔 장래 희망 종이를 들고 고민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개그맨’을 적어내라고 추천 했는데, 그 때마다 미쳤냐고 응수하면서도 한 편으론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진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웃기는 모습이 가장 좋아하는 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능력의 차원이 아닌 그저 만족의 차원에 머물러서 일 것이다.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즐겁게 할 수 있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능력 쪽은 꿈꿔본 적도 없다. 웃기는 능력은 재능과 맞물려 있음을 안다. 스스로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는 것도 싫어한다. 아마 나의 드립에 웃지 않는 거절의 반응에 상처받지 않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겠지. 내가 좋아하는 개그는 그저 소박하게 맥락을 알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낄낄거림 정도다. 그저 자기 만족쯤이기에 부담도 없고 좋아할 수 있는 모습이다. 만약 능력을 꿈꿨다면 절대 좋아할 수 없고 매일 괴로워했을 거다. 마치 조세호님이 흘리는 땀처럼.


  혼자 웃는 것도 어려운데 누군가를 웃게 하는 건 더 어렵다. 스스로도 남의 개그에 관대하지 않아 안 웃기면 단호하게 웃지 않는다. 애초에 웃는 걸 연기할 자신도 없고. 웃음을 연기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강도에 따라 다르지만, 진정한 웃음과 억지 웃음은 카톡이든 통화든 귀신같이 판별해 낸다. 차라리 웃지 말라고 하곤 하는데, 민망한 건 둘째치고 억지 웃음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억지 웃음을 바라보면 고통을 쥐어준 것 같은 씁쓸함이 곁든다. 공개 코미디 프로를 보고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 것도 이 기분 때문이다. 괜히 조마조마해지는 기분. 뭔가 관객들의 마음보다 개그맨의 입장에 이입해 차가운 리액션 앞에서 괜히 내가 작아져 버린다.


  다행히도 주변엔 웃음에 관대한 친구들이 많은 데 꽤나 행운이다.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게 만들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 하나같이 나름 기준이 뚜렷해서 안 웃긴 부분에선 웃지 않아주어서도 고맙다. 주눅들지 않고 장난스레 ‘웃어줘! 웃어줘!’라고 하며 귀찮게 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은 꼰대로, 가끔은 진지충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점점 찾기 어려워짐을 느낀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여전히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좋아하는 내 모습을 찾아 준다. 언젠가 나이 들어서도 친구들과 원격 고스톱으로 만나 괴상한 이모티콘을 날리며 킬킬거릴 수 있기를,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오래 오래 남아 있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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