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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ug 19. 2020

불행의 완장
/ 이루시엔

꼰대에 대하여

  회사 선배가 꼰대질할 땐 그나마 나았다. 꼰대가 사회악이 된 덕에 ‘저 꼰대놈’이라고 뒤에서 마음껏 욕하면 된다. 같이 꼰대를 씹어 줄 동기도 여럿이다. 좀 더 대담하면 “꼰대같이 왜 그래요.” 눈치 섞인 한마디 내던질 수도 있다. ‘나 때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을 애써 삼키며 꼰대 꼬리표를 피하려는 이도 있다.


  그런데 회사 밖에서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내게 위로나 공감이라는 포장으로 꼰대 화법을 구사할 땐 상황이 좀 애매해졌다. 은근해서 내가 예민하게 굴기도 머쓱하다.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에이, 설마 얘가 나쁜 의도가 있겠어? 라는 생각도 든다. 여튼 회사 꼰대보다 더 골칫거리다.


  그래도 답답하니 이 기회에 내 얼굴에 침 좀 뱉어야겠다. 여러가지 일이 떠오르지만 최근 들었던 말 중 누군가 내게 ‘온실 속 화초’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대충 요약하자면,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IMF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반지하를 전전하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산 자신에 비해 난 딱 봐도 고생 안 한 ‘온실 속 화초’ 같다는 거다. 난 이만큼 힘들었는데 편하게 살아온 네가 뭘 알겠냐는 눈빛은 덤이었다. 내가 기분 상한 표정을 하자 상대방은 바로 “고생 안 한게 좋은거다”라며 겉치레를 했다.


  속으로 수백가지 내 힘든 일화들이 스쳐갔지만 그냥 난 입을 꾹 닫았다. 어떻게 살아온지도 모르면서 무슨 온실 속 화초래 참 나. 하지만 여기에 불행배틀을 지피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예민하게 굴기도 애매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이전에도 종종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말을 거친 사람이 아닌데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하다가 묘하게 ‘너보다 내가 더 힘들었어’를 강조하는 말을 했더랬다. 내 회사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본인이 회사 스트레스에 병까지 얻은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내 고민은 자연스레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이게 회사 상사가 하는 말로 치환하면 “나 때는 말이야~” 아닌가 싶다.


  그러다 문득 내가 보였다. 나는 내 불행을 완장 삼은 적은 없나. 안타깝게도 꽤 있다. 친구가 최종면접에 떨어졌을 때 ‘난 다섯번 떨어졌는데 한 번 떨어진 건 별거 아니다’라고 위로(그땐 그렇게 생각했다)했던 일, 사회부 발령 나서 힘들다는 동기에게 ‘나 사회부 갔을 때 보단 상황이 낫다’라고 격려(?)했던 일, 수능을 앞둔 동생에게 ‘그래도 수능은 한방이잖아. 면접 갈 때마다 인격모독하는 취준보다 나아. 힘내’라고 응원(?)했던 일, 그 외 다수…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지금 이불킥 한번 하고 반성하고 있다.


  꼰대에도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꼰대 마인드에는 ‘나만큼 힘들지 않았는데 넌 뭐가 힘들어’가 깔려있지 싶다. 상사가 툭하면 내뱉는 “요즘 애들은”도 우리 때 ‘개’힘들었는데 너네 지금 편하게 산다 이거다. 물론 힘듦이 주는 경험, 불행이 주는 인생교훈은 무시 못한다. 그런데 이 경험과 교훈을 잘 쌓아올린 사람은 함부로 꼰대질하지 않더라. 그저 잘 듣고 있다가 밥 한번 사주거나 어깨 한 번 두드려준다. 함부로 내 불행에 빗대 남의 고됨을 평가하지 않는 거다. 내게도 이런 태도가 몸에 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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