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Aug 23. 2020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이루시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노래 가사를 유심히 본 건 고등학교 때였다. 럼블피쉬 최진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한번쯤은 실연에 울었었던 눈이 고운 사람 품에 안겨서 뜨겁게 위로받고 싶어” 구절이 귀에 꽂혔다. 뭐? 이어지는 “과거가 없는 사람은 부담스러워” 그리고 “사랑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좋겠어.” 가사까지 마음에 들어야 옙에 파일을 담았던 2010년, 이 노래는 탈락이었다. ‘어떻게 나말고 다른 과거가 있는 사람이 좋다는거야?’가 이유였다.

  

  10년이 지났다. 지금은 플레이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드라마 탓도 있겠지만 내게도 가사의 진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경험이 쌓인 건가 싶다. 가사를 쓴 사람이얼마나 사람과 사랑에 관해 고민했는지까지 알겠더라. 2020년에는 뭉클해진 내가 있다. 경험이 쌓이고 그만큼 생각은 변한다. 감흥 없던 노래가 어느새 귀에 익을 정도가 된 것처럼 말이다.


  톺아보면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이 앞서는 편이다. 한 두마디 이야기 해보고 머리스타일과 옷 매무새를 본다.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 나와 다른점이 많다는 결론이 나면 선을 긋게 된다. 누군가는 내게 “그런 식이면 누굴 만나려 하느냐”고 훈수를 두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무나 내 곁에 두지 않겠다는 기준을 갖다는 자부심이 더 크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으니 ‘유도리(ゆとり)’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여유’가 없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파수가 안맞을 걱정부터 사서 하니 낯선 이를 만나는 건 에너지를 뺏기는 일이다. 벽돌을 쌓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미장이질 하며 나만의 요새를 만들고 있는 걸 안다. 가끔 그렇게 친구가 되지 못한 이, 연인이 되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다가도 ‘어차피 나랑 안맞아서야’라고 상대방 탓으로 돌려본다.


  균열은 서서히 온다. 가만 보면 남 앞에서 나서는 걸 싫어하는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동경하기도 했다. 술꾼은 상종도 않겠다는 내가 주변 영향을 받아 이제는 한두잔 즐기기도 한다. 절대 안 신을 것 같은 운동화도 선물받아 즐겨 신었고 멀리하던 사람과도 어느새 같이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람은 변한다. 누군가가 내 삶에 밀물이 됐다가 썰물이 되어 나가면서 벽돌로 쳐놓은 요새 부분부분이 모래성으로 바뀌는 게 새삼 느껴진다. 절대 싫음과 절대 좋음은 없다. 나와 다르게 보여도 그 안에는 비슷한 점이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상대방의 다른 점이 나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을 알아간다. ‘이런 사람은 싫어’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어쩌면 내가 사람으로부터 문을 닫는 행위일 수 있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내쪽에서 걸어잠그는 그런.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좋다 싫다 무리하게 확신하는 것은 우리 세계를 좁힐 뿐이다.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다. 그만큼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이전보다는 생긴 게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합창대회에 나간다며 불러댔던 동요 ‘모래성’에는 ‘내가 만든 모래성이 사라져 가니 산 위에는 별이 홀로 반짝거려요’라는 구절이 있다. 모래성 놀이를 하다보니 시간이 지나있다는 뜻이겠지만, 마음 속 고집이 허물어질때마다 그만큼 밤하늘 별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걸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벽돌이어야 하는 부분도 필요하다. 그래도 이런 균열이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과정 중 하나이기를 조심스레 빌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행의 완장 / 이루시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