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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ug 27. 2020

고르는 건 우리 몫 / 이루시엔

유행과 취향

  태초에 반윤희가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싸이월드가 우리 감성을 지배했을 때 ‘얼짱’ 반윤희 패션은 그야말로 중학생 소녀의 교과서였다. 폴로 단가라티와 니트, 통넓은 구제 청바지와 보드화, 카고바지와 타미힐피거 가방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반윤희 싸이월드 사진 속 아이템은 용돈을 털어서라도 몇개는 구비해야했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그랬다.


  그렇다고 반윤희를 따르는 모든 여자애들이 판박이는 아니었다. 느낌은 비슷했지만 그 안에서도 스타일은 나뉘었다. 형형색색 폴로 단가라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 반면 타미 가방만은 절대로 안사겠다고 선언하며 반윤희가 입은 아디다스 맨투맨을 사들이던 친구도 있었다. 난 남색 폴로 성조기 니트를 아꼈다. 우리는 번화가를 지나가다가 서로가 좋아할만한 옷을 보면 “야, 이거 너꺼다”를 연발했다. 치, 다 반윤희 따라한 거면서.


  우리는 그걸 취향이라고 여겼다. 그래봤자 ‘반윤희’라는 유행 안에서 움직이는 거지만 그게 또 취향이 아닐 건 또 뭔가. 국어사전은 취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라고 정의한다. 그게 옷 색이든 브랜드든 모양이든 유행 속에서 피어난 작은 기호도 엄연히 취향인 셈이다. 쨍한 주황색이 왠지 모르게 불편한 난 주황색과 파란색이 한데 섞인 폴로 단가라 티를 좋아하는 친구와는 절대 같은 옷을 고르지 않았다. 같은 반윤희 스타일을 추구했다고 해도 말이다.


  취향은 유행 속에서 피어난다. 유행은 언젠가부터 몰개성을 대변하는 말이 됐지만 되레 유행과 취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지 싶다. ‘내 취향’이라는 건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에서 좋아하는 것을 엮은 것일 텐데, 매 시기마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유행을 온 몸으로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오히려 우린 유행 속에 둘러싸여 일부분을 조금씩 도려내 스스로에게 붙여놓는다. 사람은 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가 보고 안다고 생각하는 건 이미 유행이라는 바람을 타고 일상에 달라붙어 있다.


  영화나 음악, 책, 음식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베트남 쌀국수가 들어와서 프랜차이즈로 미친듯이 확장되지 않았더라면 베트남 쌀국수를 자신의 ‘최애’ 음식으로 꼽는 사람이 있었을까. 길거리에 흔히 널려있는 음식이 됐기에 쌀국수 맛을 볼 수 있었다.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쇼미더머니로 힙합 노래를 접하고 힙돌이, 힙순이가 된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이걸 진정한 취향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유행이라는 판이 차려진 이후 거기서 우리는 자신의 기호를 골라내 취향이란 이름을 붙인다.


  취향이라는 게 꼭 남들과 달라야 할 이유도 없다. 홍대에서 흔히 보이는 옷차림을 ‘딘드밀리룩’이라고 비꼬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그 사람이 택한 취향이다. 취향이 서로 겹치지 말란 법은 없다. 남들과 비슷하더라도, 그게 유행의 정점에 있더라도 나만의 유행이 모이면 취향이 되고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이 된다. 유행이라는 판은 차려졌고 거기서 내 것을 고르는 건 내 몫이다. 좋으니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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