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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Aug 31. 2020

괜히 불안해 / 이루시엔

내 인생을 다섯 글자로 표현한다면?

  지나친 낙관이 항상 부럽다. 오늘만 사는 이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내심 저들이 됐으면 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해결해 준다고 믿는, 일이 잘 안 풀려도 길은 어디로든 나 있을 거라고 여기는 이들을 보면 묘한 경외심까지 생겨났더랬다. 사람은 본디 내게 없는 것을 질투하기 마련이라고 합리화하면서도, 이런 생각조차 부질없게 만들어버리는 낙관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불안해.’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또 불안을 어떻게 정량화할 수 있겠냐마는 스스로 꽤 불안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다’는 감정보다 ‘못 하면 어쩌지’란 감정이 휘감는 일이 잦았다. 기억 한 쪽을 떼내어 순간을 생각하면 항상 초조해하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입으로는 ‘아이캔두잇’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못해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생각뿐이었다. 인생 망하려나 싶은 그런 감정.


  그러다 보면 한없이 작아진다. 이 모습이 마음에 들 리 없다. 대범한 척해도 불안감이 어디 갈리 없다. 그래서 뭐든 기필코 해내야지 했다. 어떻게 보면 ‘불안은 나의 힘’일 수도 있다. 시기적절한 대학 입학, 늦지 않은 대학 졸업, 또래 가운데 이른 취직, 빠르게 찾아온 괜찮은 단독 기사, 그리 길지 않았던 연애 공백 기타 등등. 정도(定道)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쉼 없이 달려온 기분이다.


  ‘괜히.’ 24살에 입사하고 싶어 23살부터 집까지 옮겨가며 본격적으로 취준에 뛰어들었다. ‘아직 어리니 좀 마음 놓고 해도 된다’는 언니, 오빠의 조언에도 ‘뭐가 어려, 빨리 해야해’라는 퉁명이 절로 나왔다.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랬다. 괜찮은 기사를 쓴 다음에는 더 큰 불안감에 잠을 설쳤다. 다음에도 이런 기사를 써내야 할 텐데 못쓰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잘하고 있다. 너무 초조해 보인다’는 선배 말에도 ‘선배 같으면 안 초조하겠어요?’라는 속말이 기어 나왔다.


  이 글이 입사지원서라면 ‘불안감을 원동력으로 열심히 살았다’라고 끝냈을 거다. 그러나 포장을 뜯어내고 솔직히 나를 마주하면 그 안에는 즐거움과 재미, 여유가 없었다. 불안감은 호시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다. 여유를 좀 더 가졌으면, 그 속에서 재미를 좀 더 느꼈으면 어땠을까 싶다.


  같은 언론사만 4년 내내 지원하고 광탈을 반복하다 5년째 드디어 합격한 사람을 보면서, 무심히 혼자 있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잘 지내는 친구를 보면서, “오늘 단독 썼으니 이번 달은 좀 힘 빼련다”라며 업무 조절을 잘 해 다시 또 괜찮은 기사를 써내는 선배를 보면서, ‘저게 내가 진짜 원하는 모습인데’라고 수시로 되뇐다.

무엇을 빠르게 이뤄야 불안감이 해소되니 ‘A가 하고 싶어’보다는 ‘B만 아니면 된다’가 기본 세팅으로 돼버린다. ‘A대 00과에 가고 싶어’가 아닌 ‘B대학 이하만 아니면 돼’ 같은. 일정 기준 이상만 만족하면 된다는 건 빠른 시일 내 이룰 수 있을 만한 보기를 늘리는, 나름의 보호막 같은 셈이다.


  불안함에 쫓기다 보니 내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원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불안함에 잠길 때면 가을방학의 ‘가을겨울봄여름’을 틀어놓는다. ‘문득 둘러보면 꽃들도 새들도/ 다들 자기만의 일 년을 사는 것/ 민들레의 봄은 종달새의 겨울인 것을.’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캄 다운, 캄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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