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탈모 얘기가 나온다. 어제 본 축구 경기 얘기보다 내일 출근 걱정을 한다. 오래 사귄 애인과의 결혼을 말하는 녀석의 웃음은 어째 소주 뒷맛만큼이나 쓰다. 공주 같은 애인보다 이 풍진 던전을 함께 헤쳐나갈 동료가 필요하다는 말에는 모두가 웃는다. 그렇게, 누구나 아저씨가 된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꿈꿔오던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나이 먹는 일을 기꺼워했다. 어째 서른은 다르다. 돌도 씹어먹을 것 같은 패기는 사라지고, 불같이 성을 내본 적은 언제였나 기억도 가물가물. 그냥 그러려니, 시큰둥해지는 게 늘어만 가는 것을 보니 최선을 다해 삶을 낭비하던 때만큼의 기력은 이제 없나 보다.
사실 자신의 나이를 가장 의식하게 되는 순간은 주변 사람의 나이에 화들짝 놀랄 때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느덧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가 되셨고(耳順) 올해는 환갑 선물도 더러 받으셨는데, 나는 육십갑자가 한번 돌았으면 이젠 중년도 지난 것 아닌가 불효막심한 생각을 했다. 나 어릴 때만 해도 환갑잔치가 흔했고, 환갑 넘은 어른들은 명절 때마다 상석에 떡 하니 앉아계셨으니 아버지의 환갑은 새삼 놀라운 것이었다. 심지어 아버지의 나이를 처음 알게 된 때의 아버지는 고작 서른여섯이었으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때의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은 내 생각만큼이나 어른은 아니셨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5년쯤 뒤에 그렇게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지 않는다.
서른이 된 누군가는 이십 대를 돌아보며 이제 잔치는 끝났다고 하겠으나, 여태 나의 잔치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이십 대를 잔치였다고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더는 그때의 모습으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는 곳이 달라지면 기억은 늘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되는 법이다. 유독 한국만 그런 것인지, 우리 사회에는 나이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꽤 뚜렷하다. 나이에 걸맞은 행동, 특정 나이대에 요구되는 자질, 이런 것쯤은 척척 할 수 있어야 어른이라는 요상한 믿음들까지, 그냥 시간이 지나서 지금 나이가 된 것뿐인데 어째 점점 나이 눈치를 보게 된다. 그 중 서른에 요구되는 기대라면, 역시 제 밥그릇 정도는 스스로 차야 한다는 것일 게다. 서른은 ‘내 먹고사는 일은 스스로 책임진다’라는, 어른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마땅히 해결해야 하는 나이이다.
자조 섞인 표현이 입에 자꾸 붙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뜻을 세우기는커녕(而立) 울컥 솟는 부러움에 한없이 무력해지곤 한다. 내 사는 세계는 여전히 학생으로서의 그것에서 한 걸음도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편에선 주변 다른 서른들의 삶이 훨씬 축제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씀씀이가 부럽고, 그걸 좇느라 가랑이 찢어질까 안절부절, 부모 지갑이나 가벼이 할 뿐이다. 하여 이번에는 내 씀씀이를 부끄러워한다. 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 사이를 줄곧 헤매다가 서른이 되었는데, 염병할, 잔치는 무슨 잔치가 있었단 말인가.
‘돈도 못 버는 새끼가’ 말주변은 좋아서 ‘부모 미래 팔아다가 자기 현재 사는 놈들은 다 도둑놈이야’라는 말을 뇌까린다. 조소를 안주 삼은 술자리에서 누군가 소주를 따르며 입을 연다. ‘다 자기 길이 있고 다 자기 때가 있는 거야.’ 안다. 심지어 나는 내 일을, 그 생산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을, 몹시도 사랑한다. 그저 남들은 끝났다고 아쉬워하는 그 잔치가 지긋지긋할 때가 있고, 나만 초대받지 못한 다른 잔치는 너무도 멀리서 반짝거릴 뿐이다. 서른 난 아들을 둔 부모 앞에서 죄인이 되는 주제에 남의 잔치를 부러워한다. 제 부모 주름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속도 없이 잔치 구경이나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