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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Nov 17. 2020

나아지는 것, 나아가는 것 / 박브이

서른 즈음에

  "빼곡한 일기장의 내가 낯설은 순간 마다 자연스럽게 뒤를 되돌아보게 돼.

  과연 지금의 나를 그애가 올려다보아 줄까 하는 그런 질문에 고개를 숙이네."


  20대 중반에 만들어서 노래했던 곡의 첫 소절이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고 그때 상상했던 것과는 분명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를, 저 노래를 부르던 시절의 나는 올려다봐 줄까. 그보다 조금 더 전에 만든 다른 노래에는 '교복의 명찰을 떼고 보니 더 중요한건 내가 되고 싶은 게 되는 거 말고 되고 싶지 않은 게 안 되는거더라고' 라고 적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에 얼마나 가깝고, 되고 싶지 않았던 모습과는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작정 나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른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이였을 땐 아무 생각 없이 차곡차곡 오늘을 쌓다보면 저절로 어른이 될 것이라 믿었고, 하루라도 더 어른에 가까워질 내일을 들뜬 마음으로 가볍게 기다렸다. 지금 부족한 것은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가득 찰 것이고, 모르는 것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새로운 것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큰 것 하나만을 소박하게 웃으며 바랄 수도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어른이란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버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잔인할 정도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은 나를 붙잡고 끌고 나와 어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내일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하나 줄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부족해서 채우려고 할수록 공백만이 눈에 밟혔고, 무언가를 더 알아갈수록 아직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같이 알게 되었다.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이는 바람에 새로운 것은 귀찮아졌다. 하나의 큰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철없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되어버린 어른 뿐이었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것만 같았다.


  한창 가사를 써내던 시절의 나는 이렇게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채로 무언가가 되어 버린다는 것, 동시에 잃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들을 잃어야 한다는 것에 괴로워 했다. 아직 이룬 것은 없었고,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 보다는 이뤄내야 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 그때는 원래 그런거라며 조금만 더 지나면 다 알게 된다고 이야기하던, 먼저 어른이 된 이들의 말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연필을 깎아내듯이 잠을 깎아내며, 덩달아 날카로워지는 고민을 가사에 담아내려 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누가 보아도 어른일 지금의 나는 그저 나아가는 것이 어른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여전히 내일은 매일 무겁게 다가오고, 무지는 두려우며, 미지는 신선하기보단 낯설다. 점점 점처럼 작은 것 하나조차 바라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어른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온전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내가 어른이 되고 말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렇게 짚어 나가다보면 스스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다들 그렇게 비슷하게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가만히 넘어가고 말아버리는 것이 무서울 때가 있다.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면 조금은 피곤하지만, 살아가다보면 답이 없는 고민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우리는 끌려가는 것이 아닌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색 위에 다른 색을 덧칠 할 것 없이 그대로 두면 된다. 스스로 쓰고 불렀던 노래의 후반부 이러한 가사를 보면, 그때의 나도 아마 비슷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가끔 찾아 들으면서 지금의 내가 위로를 받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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