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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 May 04. 2020

(A-Life) 반팔 반바지로 맞은 시드니의 겨울

눈물로 보냈던 첫 3개월



내가 유학생활 첫 3개월 동안 흘렸던 눈물의 양은, 현재 3년은 울어야 비슷해지지 않을까? 

정말 독해도 너무 독했다 17년 전의 나, 그리고 여태까지 너무 고생했다. 





여차저차 유학 준비를 잘 마치고, 드디어 호주로 떠나는 날이었다. 유별난 우리 가족은 거의 모두가 공항으로 배웅을 나왔다. 명절인 줄 알았다. 그리고 뭔가 좀 창피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일가친척들까지 모여서 배웅을 해준단 말인가.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공항으로 갔다. 공항으로 가는 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부었다. "아.. 비행기 안 떴으면 좋겠다. 이런 날씨에 비행기가 어떻게 떠?" 중얼중얼, 한국을 떠나는 게 아쉬워서 공항 가는 차 안에서 한참 구시렁거리던 게 생각난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다리를 건너자마자, 거짓말같이 비가 멈추고 파란 하늘이 나왔다. 


"아..... 비행기 뜨겠구나" 




유독 시끌벅적한 공항이었다, 연예인들도 좀 봤던 것 같고.. 티켓팅까지 마치고 나니 그때부터 뭔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사실 공항 오기 직전까지 놀이터 쉼터에서 제일 친한 친구랑 만화책 보고 있었다. 떠나는 것같이 뭐 하지 말고 평소처럼 있다가 가자며, 만화책 보다가 공항으로 갔다. 가족들이 한 명씩 다 인사를 해주는데, 그때부터 밀려드는 불안함과 무서움이 주체를 못 하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빠는 덤덤히 나를 달래기 시작했고, 엄마도 울었던 걸로 기억난다. 이미그레이션으로 들어가는데, 정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었던 것 같다. 지금부터는 나 혼자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혼자 되새기면서 갔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계속 울면서 수화물 검사를 하고 이미그레이션을 지나서 게이트로 향했다.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았는지 챙겨야 할 것도 많았다. 들어오기 전 아빠가 수없이 말했다. "퍼플아, 챙겨야 할 가방은 총 3개야. 잊어버리지 말고 찰 챙겨" 우는 와중에도 내가 지금 챙긴 짐이 몇 개인지 계속 헤아리면서 게이트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는 거의 기억도 안 난다, 그냥 앉아서 계속 울었던 것만 기억난다. 주변에 아주머니들이 "학생 혼자 유학 가는 거야?"라고 물어보면 대성통곡을 하면서 네라고 대답했던 것만 기억난다. 내가 이렇게 울 거라고 예상을 하셨을까, 우리 아빠는 비행기를 마지막에 비즈니스 좌석으로 바꿔주셨다. 탑승수속이 되었고 비행기에 올랐는데, 뭔가 허전했다. 분명 가방은 3개인데, 뭐가 손에 들려있었던 것 같았는데.. 점퍼가 없어졌다!.. 한국은 한여름이라 반팔에 반바지였는데 계절이 반대인 호주라 점퍼를 손에 들려 보내셨는데, 언제 없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번에 말했듯이 나는 첫 해외여행이었으니, 아무것도 몰랐다, 승무원 언니에게 무작정 난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그 승무원 언니에게 너무나 죄송하다. 승무원 언니는 안된다며 나를 막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점퍼가 없어졌어요, 어디다가 두고 온 것 같은데 시드니 겨울이래요 점퍼 찾아야 해요." 승무원 언니는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비행기 한번 탑승하면 다시 내릴 수 없으니, 본인이 밖이랑 연락해서 어디에 있는지 가져올 수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모든 승객이 탑승했고, 승무원 언니가 다시 찾아와 말해주길, 맨 처음 수화물 검사하는 데다가 두고 왔다고 부모님 연락처 주시면 그쪽으로 양도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7월 한겨울 호주에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입성했다. 





지금처럼 한국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다. 한국에서도 영어교육이 활발하지 않았을 때였다. (물론 내가 사는 지역만 그랬을지도 모른다). 영어는 수능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고, 내가 영어를 쓸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의 시드니 첫 이미지는, 온 사방이 영어였다. 내리자마자 알 수 없는 영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었다. 다행히 비행기 옆자리에 참 좋은 언니가 앉아있었다. 그때 당시에 대학생이라고 했는데, 언니가 출국심사까지 잘 데려가 줘서, 쫄래쫄래 잘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대한항공을 타고 들어가서 한국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입국심사대에서 기다리면서 얼마나 많은 인사 연습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Hello? Hi? I can't speak english" 혼자서 한참을 중얼거리면서 마주한 입국심사대 아저씨. 인사도 안 해주고 도장만 찍어주고 나보고 지나가라그랬다. 머쓱해라.... 아무튼 친절한 언니 덕분에 수화물까지 다 찾고 밖으로 나갔는데, 나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던 분이 안 계셨다. 언니가 전화기를 빌려줬고 그분에게 도착했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거의 다 도착했다고 조금만 기다리라 해서 밖으로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 


추웠다. 엄청 추웠다. 하늘은 파랬는데 추웠다. 아무리 여기 온도가 많이 안 떨어진다고 하지만, 처음 오는 해외에 그것도 겨울에 반팔 반바지는 추웠다. 내 앞으로 유학생활이 차갑고 시리고 힘들 거라고 미리 알려주듯, 그 날은 유독 추웠다. 


집에 도착해서 가져온 짐을 풀었다. 내 유학 준비를 처음부터 도와주셨던 엄마의 지인분이셨다. 이모뻘이었는데, 독신이었고 그냥 친절한 이모였다. 손수 내 짐을 다 정리를 도와주시고 피곤할 텐데 조금 누워있으라고 배려해주시고는 나가셨다. 언제 엄마랑 통화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냥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3개월을 울었다, 저녁에 집에 앉아있으면 문을 열고 엄마 아빠가 들어올 것 같았다. 잠이 들면 밖에서 엄마 아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3개월을 꼬박 매일 밤을 울었다. 하지만, 엄마랑 통화할 때 나는 늘 씩씩한 큰딸이었다. 엄마 나 괜찮아! 여기 너무 재밌어, 나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또 나는 한참을 울다가 잠들었다. 


몇 년 전 엄마 아빠가 말씀하시길, 너는 어린 나이에 혼자 엄마 아빠 떨어져서 참 씩씩했어. 이렇게 말씀하시기에 말씀드렸다, 꼬박 3개월을 울었다고. 그때 깨달았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엄마 아빠는 알 수가 없었다는걸. 






잃어버린 점퍼는 그다음 날 집으로 배송되었고, 아빠는 그 날 저녁 집에서는 입에도 안 대시던 맥주 한 캔을 엄마와 나눠 드시고 잠에 드셨다고 했다. 어린 첫째 딸을 떠나보내는 건, 떠나보내는 부모도, 혼자 떨어지던 나에게도 생각보다 엄청 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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