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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영 Mar 13. 2023

지키고 싶은 선의와 우정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7월의 어느 날 오후, 두 남자가 38번가의 한 건물에 기대 서 있었다. 둘 다 대머리에 입에는 시가를 물고, 목줄을 맨 작은 개를 한 마리씩 데리고 있었다. 요란한 소음과 열기, 먼지, 혼란 속에서 두 마리의 개는 쉬지 않고 짖어댔다. 두 남자 모두 험상궂은 표정으로 자기 반려동물을 쳐다보았다. "왈왈, 그만 좀 짖지 못해?" 한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왈왈, 그래 계속 짖어라." 다른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본 두 남자가 씩 웃었다. 그들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번졌다. 그들은 공연을 했고, 나는 그 공연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 나는 그 거리가 꽤 자주 나를 위한 작품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반짝이는 경험의 빛을 탄생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준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의 이 대목을 읽고, 나는 내가 책 속의 고닉이라도 된 듯 웃음을 터뜨렸다. 38번가 한가운데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의 열감이 나를 감쌌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타인에게서 나를 위한 작은 조각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주고받는 선의의 짧지만 강렬한 달콤함. 여기에 중독된 고닉은 자주 웨스트사이드 거리로 나갔다. 그를 위로하는 것은 뉴욕 도시와 그곳을 누비는 사람들이었다. 군중 속에서 안도감을 찾고 싶은 그의 마음을, 뉴욕 거리는 정확히 이해했다.


집을 나선 고닉의 눈앞에 크고 작은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두 남자는 자기들의 장난기 가득한 대화에 슬쩍 그를 끼워주고, 길을 건너려던 여자는 고닉을 향해 몸을 돌리고선 방금 막 지나간 트럭에 대해 불만을 쏟아낸다. 마치 당신과 나는 한 팀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 이것을 고닉은 '공연'이라고 불렀다. 홀로인 채 종일 누군가와 함께였던 그에게 친구는 말한다. "그 사람들이 진짜 네 사람들이네."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으로 매일 곤두박질치는 나조차도,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이 사랑은 고닉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닉이 만난 저 이름 모를 퍼포머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 무해한 눈인사,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슬며시 비집고 나오는 미소 같은 것. 내게도 그런 게 절실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속한 사람임을, 인류의 일원임을 상기시킬 수 있는 어떤 근원적 연결감이. 이제는 희미해져 흔적만 남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인간에게 좀처럼 기대나 애정 같은 것을 품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최근 동생과 내게 새로 생긴 습관은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제 편의점 사장님이 비둘기에게 쌀 뿌려주는 걸 봤어. 따뜻한 분 같아." "어린이가 탈 때까지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기다려 주더라니까." "그것 봐. 세상엔 멋진 사람도 많지?"


우리는 누군가의 드문 선의를 목격하면 그것을 둘만의 대화 상자에 잘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곤 했다. 미움과 절망이 똬리를 틀 때면 그런 이야기들은 어김없이 소환되어 나왔다. 우리 자신에게, 서로에게 누군가의 선의를 다시 들려주는 일은 화급하고도 중요했다. 인간에 대한 실망이 포기나 경멸로 변하는 것을 막아야 했으니까.


고닉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언젠가 만난 적 있었고 앞으로 만날지 모를 그 모두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인간의 선의에 오래 목말랐었다는 것을, 타인을 향한 우정을 다시 불 지필 계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내가 찾고 싶었던 아름다움이 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공연을 하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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