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보호자의 '할까 봐' 심리가 반려동물을 망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반려동물이 배고플까 봐 미리 음식을 가져다 주고, 추울까 봐 옷을 입혀 주는 행위는 따라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어느새 응석받이가 되어버린 동물이 반려인과의 관계를 망칠지 모른다는 걱정이, 이런 진단을 낳은 원인인 것 같았다.
큰 틀에선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할까 봐'를 달고 사는 나로서는 끝내 완전히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핵심은 '염려'에 있었으니까. 목이 마르지는 않을까, 몸 어디가 아프지는 않을까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 말하자면 내게 염려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길동물들을 돌보며 늘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에 시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밥을 굶은 채 나를 기다리는 고양이가 있을까 봐 염려가 되었던 탓이다.
나는 우리에게 더 많은 염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염려는 한 사람의 마음 상태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불쾌할까 팔을 안쪽으로 모으고, 뒤에 오는 사람이 불편할까 문을 잡아주는 것. 식당에서 눈이 마주친 어린이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선물하는 것. 다른 사람의 배려와 염려를 건네받은 이는 그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몸속에 차곡차곡 쌓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비슷한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줄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를 읽으며, 나는 이런 염려가 멀리 퍼져나가 우리가 사는 행성을 온통 덮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토카르추크는 이렇게 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운명의 섭리, 혹은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인해 어쩌다 실감하는 상호 간의 연결성과 긴밀한 영향 관계. 나는 평생 이러한 것들에 매료되었습니다. (…) 언뜻 보기에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이어 주는 놀라운 연결 고리에 대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염려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어딘가로 계속 흘러갈 것이라는 걸.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나에게서 누군가에게로, 그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염려가 이어지는 모습을 본다. 이 행성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된다면 그건 이런 염려의 선순환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