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받아야 하는 부록
6:00 a.m.
“띠리리리리링....”
알람이 울리면 2차 대전보다 치열한 전쟁이 주이의 내면에서 발발한다. 일어날 것이냐, 더 잘 것이냐. 어젯밤, 밤을 미루며 마신 맥주 탓인지 몸도 눈꺼풀도 천근만근이다. 하지만 생각은 이미 레깅스도 입고 양말도 신고 현관문도 열어젖혔다. 근데, 어째서 몸은 아직도 포근한 침대 속일까?
‘최주이, 정신 차리자. 시드니에 늦잠이나 자자고 온 게 아니잖아? 하루의 시작, 아침에 이 자그마한 태도가 내 하루를, 내 시드니 전집 사업의 승패를 결정하는 거다.’
주이는 빠른 움직임을 위해 구호를 외친다. 몸이 무거울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5, 4, 3, 2, 1."
나갈 준비를 마친 주이의 영혼은 '1'이 끝나기 직전 무거운 몸뚱이를 들어 올려 침대 밖으로 꺼내는 데 성공했다. 창밖으로 시드니의 청량한 아침 햇살이 집 안을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파란 하늘, 하이드파크 한가운데, 룰루레몬 레깅스를 입은 마흔 살 최주이가 서 있다. 매일 새벽 하이드파크를 산책하는 일은 워킹맘으로 12년째 살아온 주이가 한국에선 꿈도 꿔본 적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호주, 시드니니까 가능한 일. 주이는 축복받은 이 도시의 공기를 욕심내며 도심 속 자연을 여유롭게 산책하는 '갓생'을 살고 싶었다. 도시의 소음을 완벽하게 캔슬링 한 에어팟에서 스텔라장의 L’amour les baguettes, paris 가 흘러나왔다. 노래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이라도 된 냥 턱을 꼿꼿이 세우고 빠르게 걸었다. 호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뮤지엄 역과 그 뒤로 이어진 하이드파크 산책로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이윽고 하늘을 찌르는 St.Mary's 성당이 보인다. 숨을 고르고 벤치에 앉아 뜨뜻하게 달궈진 근육을 식혔다.
늠름한 셰퍼드를 앞세워 산책하는 할아버지의 눈과 주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나눴다. 주이는 셰퍼드를 향해 손을 뻗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주이 앞에 멈췄다. 정확히는 개가 주이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할아버지를 이끌었다.
"개 이름이 뭐예요?"
"Jully예요"
"오, 멋진 숙녀로군요. 착하고 건강해 보여요"
"수줍음이 많답니다. 하지만, 당신이 좋은가 봐요."
주이의 탄탄한 허벅지를 킁킁거리는 셰퍼트를 그년 머리에서 목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잠자코 그 손길을 느끼던 Jully는 눈을 껌벅이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주이도 손바닥에 닿는 개의 체온을 오래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만치 다가오는 다른 개를 발견한 녀석이 주이의 손을 스르륵 빠져나갔다.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이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Jully를 따라 나섰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이는 문득 개 이름은 묻고 할아버지 이름은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소가 터졌다. 호주에서는 서열 1위가 어린이, 2위가 개, 그다음으로 여자, 마지막이 남자라는 농담이 떠올라서였다.
허리밴드에 끼워 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개와 산책하는 노부부,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나눠 먹는 남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지는 시내버스. 고개만 돌리면 사방이 천국 같은 하이드파크의 아침 풍경을 '찰칵' 담는다. 머잖아 그리워할 오늘을 마일리지처럼 모아 곶감 빼먹듯 꺼내먹을 요량으로.
여름 호주의 카페가 새벽 5시에 문을 연 덕분에 주이는 산책 후 찾아오는 허기를 달랠 수 있다. 구글맵을 켜고 평점 4.0 이상의 카페를 검색한다.
'오늘은 고소한 플랫화이트와 짙은 버터향 나는 바나나브레드가 당기는데? 아니지, 꾸덕한 크림치즈 블루베리 팬케이크가 일품인 Theeca에 가 볼까? 토마토소스에 탱탱한 베이크드 에그, 모짜렐라 치즈가 쫄깃한 Ground of the City도 좋겠는데...'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는 듯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다. 골라 먹는 재미로 풍성한 시드니의 브런치는 일찍 일어난 그녀에게 호주가 하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호사스러운 브런치를 마친 주이는 오전 7시 10분 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등교준비를 시작한다. 농장에서 막 딴 듯 노랗고 싱싱한 망고와 부드럽고 담백한 저지방 우유, 달콤 바삭한 시리얼로 아침을 차렸다. 도시락 통에 스윗칠리소스에 버무린 소떡소떡, 참치마요 주먹밥, 팩주스를 정성스럽게 담았다. 그 순간 '퍽'하고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거 뭐지?!”
“흘리는 거…”
"엄마가 우유는 특히 조심하라고 했지!"
주이는 행주를 들고 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쏟은 우유를 훔친다. 엄마 눈치를 본 아이들은 여느 때와는 달이 도시락과 준비물, 모자 등을 착실하게 챙긴다.
시계는 어느새 8시를 훌쩍 넘겼다.
"빨리 나와, 늦겠다. 5!"
현관문을 연 채로 아이들을 부른다.
"4!"
"3!"
"2!"
"1!"
서둘러 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뜬금없이 주이는 지난 10년 간 자신이 말한 <오, 사, 삼, 이, 일>이 몇 번쯤 될까 궁금해졌다. 하늘색 교복이 잘 어울리는 녀석들은 알 수 없는 유행어로 서로를 짓궂게 놀려대다가, 등교시간이 늦을세라 뛰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난 뒤에야 오로지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주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김치전, 해물파전, 오색산적의 재료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영업준비를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새벽에는 안 보이던 묵직한 회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변덕스러운 시드니 날씨 같으니.'
하지만 괜찮다. 흐린 날엔 본디 전이 당기기 마련이니까. 평소보다 더 많은 재료를 크기가 다른 컨테이너에 소분한 뒤 보냉가방에 넣어 지퍼를 잠그면 영업준비 완료. 주이는 재료들을 챙겨 가게로 향했다. 가게 문을 활짝 열고 팬을 예열한다. 메뉴가 적힌 배너도 바깥으로 꺼내 세웠다. 챙겨 온 재료들을 매대 옆에 줄 지어 진열하고 뒤지개와 포장지, 키친타월을 차례로 꺼냈다. 매대 바깥 ‘CLOSE’ 팻말을 ‘OPEN’으로 뒤집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팬에 튀김유를 듬뿍 두르고 준비한 반죽 한 방울을 ‘통’ 떨어뜨리니 반죽이 팝콘처럼 피어올랐다. 지금이다. 반죽을 차례로 한 국자씩 퍼올려 팬에 붓는다. 먹기 좋은 둥근 모양으로 반죽을 다듬는 주이의 손길이 바쁘다.
"제가 먹어 본 한국음식 중에서 김치전이 두 번째로 맛있어요."
이미 김치전 하나를 주문해 손에 쥐고 먹는 Leesa가 전 부치는 주이의 손놀림을 빤히 쳐다보며 자꾸 말을 건다.
"첫 번째는 뭔데요?"
"양념치킨이요. 너무 고소하고 달콤한 게 꼭 과자 같아요."
"그건 저도 격하게 동의합니다. 한국 양념치킨 맛 못 따라가죠."
"우리 애들은 양념치킨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해요, 사진을 보니 한국에선 양념치킨도 종류가 여러 가지 던데요?"
말할 때마다 흔들리는 커다란 아치형 귀걸이는 Leesa가 입은 린넨 원피스와 잘 어울렸다. 전부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Leesa의 호주식 영어발음이 주이는 솔직히 버겁다. 귀와 입은 영어에, 손과 머리는 전을 부치는데 집중하느라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급기야 질문에 답을 못해도 Leesa는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튀기듯 현란하게 부치는 김치전과 주이를 번갈아 살피는 Leesa의 눈빛에 호기심이 그렁그렁하다. 손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주이는 전 값에 관람표가 포함된 서커스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앗.”
긴장을 했는지 전을 뒤집다가 기름이 튀어 손가락이 뎄다. 영어 들으랴, 전 뒤집으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뒤집기 신공을 부릴 땐 더 잘 덴다. 손등이며 팔목이며, 안 덴 곳이 없는 주이의 손. 장갑 좀 끼고 하라는 진혁의 잔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안전을 생각하면 끼는 게 좋겠으나, 장갑에 기름과 반죽이 덕지덕지 묻으면 더 거추장스럽다고, 음식은 자고로 손맛이 아니냐며 주이는 기어코 젓가락질도 맨손으로 했다. 그러니 손가락 곳곳에 덴 상처들이 그득할 수밖에.
주이는 아픈 내색을 하면 손님이 걱정할까 봐 별일 아닌 척 재빨리 냉동고에서 아이스팩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빠른 응급처치를 위해 냉동고에 아이스팩은 필수.
아등바등한 순간들은 주이가 기꺼이 받아야 하는 시드니 전집의 부록이다. 체력을 사수하려 일어나기 힘든 몸을 기어코 공원까지 끄집어낼 때에도, 아이들이 카펫 바닥에 흘린 우유를 다섯 번씩 훔쳐 닦으면서도, 데인 손의 화기를 빼려고 아이스팩을 강하게 움켜쥘 때에도 주이는 잊지 않았다.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것,
이것은 살면서 반드시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는 걸,
상상만 했던, 간절히 바라던 일을 결국 해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드니 전집의 사장 최주이, Stella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