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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Jun 12. 2024

기록이 나를 데려간 곳에서 만나는 질문

기록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

"여행을 가기 전부터 책을 낼 생각을 하고 기록하신 거예요?"


<우리의 겨울이 호주의 여름을 만나면> 에세이 출간 후 많은 사람들에 이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니요."라고 답했지만 마음속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었다.


‘네, 사실 스물셋 일 때부터 집필을 시작한 책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2005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록이 시작됐다. 시드니 고든(Gordon) 카페에서 난생처음 아르바이트 했던 경험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일기에 썼다. 세월이 흘러 노트의 기록은 블로그라는 온라인 공간에 비공개 일기로 옮겨졌고, 그중 일부가 2023년에 출간한 <우리의 겨울이 호주의 여름을 만나면> 에세이에 수록됐다.


"띠- 띠- 띠-." 빨간 노키아 기계음에 눈을 떴다. 컴컴한 방에서 조용히 가방을 챙겨 나왔다. 하얀 입김이 보이는 새벽, 어둠을 밀어내는 아침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Central역을 향해 걸었다. 역에 도착하기 100m 전, 향긋한 커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우유 스팀기가 내뿜는 증기기관차 소리와 공중으로 퍼지는 허연 스팀을 지나쳐 지하철 계단을 턱턱 내려간다. 일주일간 사용할 RED LINE 패스를 빠르게 구입하고 막 도착한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에 걸린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에서는 에이브릴 라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윽고 창 밖으로 어둠을 걷어낸 파란 하늘 아래 오페라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중략)
스테인리스 재질의 사각 트레이를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슬라이서를 이용해 살라미, 터키, 햄, 비프의 순서로 얇게 자른다. 비프는 냄새가 고약하니 제일 나중에 잘라야 한다. 치즈는 자른 즉시 손으로 집기 편하게 모서리를 교차하여 쌓았다. 뒤이어 오이, 토마토, 양파도 잘랐다. 레터스(양상추), 비트루트, 선드라이 토마토를 트레이에 담았다. 레인지에 데운 뜨거운 닭가슴살을 한소끔 식혔다. 여사장님은 치킨 샌드위치의 맛은 찢어낸 살이 결정한다고 매일 말했다. 다른 가게는 편리하게 닭가슴살을 칼로 자르지만 우리는 닭고기의 결을 살려 찢기 때문에 훨씬 맛있는 치킨 샌드위치가 된다고 비밀처럼 속삭였다. 나는 고든 샌드위치에 자부심을 느끼며 더 촘촘하게 찢느라 장갑 낀 손톱에 힘이 들어갔다. 다 찢은 닭가슴살은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가지런히 쌓아 담았다.

<우리의 겨울이 호주의 여름을 만나면>, 최화영


이 글을 읽으면 다시금 허연 입김이 나던 서리힐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느껴지고, 역 앞 커피머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끄러운 수증기 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슬라이서로 햄을 ‘쓱싹’ 하고 자르던 소리와, 힘주어 닭가슴살을 찢던 손놀림을 엄지와 검지가 기억해 낸다.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경험을 묘사한 일기를 읽는 일만으로 17년이 지난 과거를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냥 떠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의 나로 빙의한 기분마저 들어 타임머신을 탄 듯 하다. 원한다면 스물셋이 되어 고든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싸고, 카운터 앞에서 주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나는 기록을 보물같이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여행이 끝나면 두고두고 곱씹을 기록을 최대한 많이 저축하려 욕심냈다. 씹으면 새콤한 단물이 터져 나오는 풍선껌 같은 기록을 더 많이, 더 오래 소유하고 싶었다. 기록한 만큼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것도 아닌데 여행 중에는 노동과 기록을 분간 못할 만큼 공을 들였다. 글의 특성상 짧든 길든, 글을 쓰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 그리고 창의력이 요구된다. 챙길 것 많은 아이들과의 여행에 종이와 펜이 자리할 공간도 없고 글쓰기에 내줄 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어 '루나파크', '솜사탕', '아이스크림 세 스쿱 9불'과 같은 키워드를 메모했다. 이동 중 눈과 손가락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녹음을 하거나 텍스트 음성인식 기능을 활용했다. 인공지능이 받아 적은 텍스트는 실수가 많았지만 기억의 실마리로는 손색이 없었다. 그마저도 여유가 없을 때에는 스마트폰을 길게 터치하면 나타나는 카메라로 재빨리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스마트폰에 덕지덕지 붙여 둔 기억의 조각들을 짬이 날 때마다 떼어 내면서 문장과 서사를 완성해 나갔다. 키워드, 사진, 동영상 등 기억의 실마리들을 부여잡고 과거로 침잠했다. 단단한 집중력이 요구됐다. 집중해서 쓴 날은 (화장실에 간 시간은 빼고) 6시간을 내리 앉아 쓴 적도 있다.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나도 몰입해서 쓰느라 뱃가죽과 등가죽이 서로 달라붙어버린 것 같은 기이한 체험도 했다. 단기간에 살이 빠져 뇌집중은 운동 못지않게 엄청난 칼로리를 소모한다는 걸 깨달았다.

21세기가 아직 발명하지 못한 타임머신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고 있다 생각하니 신이 나서 기록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글이 산더미처럼 불어난 기록들을 처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빠르게 실패하기 신념으로 출판에 투고를 시작해 결국 출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록을 꺼내 읽기로 작정하면 글이 묘사한 시간과 장소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새이버링(Savoring)이란 ‘음미하는 기쁨을 자각하며 의도적으로 행복감을 증폭시키는 태도‘를 말하는데 기록 속 새이버링의 밀도에 따라 몰입의 정도가 달라진다. 새이버링 필터를 거치면 ’맛있다‘는 표현은 ’혀 끝에 푹신한 솜사탕이 닿는 기분이었다.‘가 된다. ’즐거웠다.‘는 표현은 ’1분 1초가 아까워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로 바뀐다. 실제로 느낀 감정을 내가 아는 단어를 총동원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옮길수록 과거는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현재인지 과거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몰입의 구석에서 문득 나는 어떤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던 스물셋의 내가 그때 꿈꾸던 미래에 지금 나는 살고 있을까?

나는 지금 그 시절 내가 바라던 인생을 살고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기록한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일로 나의 남은 생이 살아지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어떤 숙제를 내줄 것인지 기록해 보는 건 어떨까. 단정한 정원이 있는 가정집에서 마들렌을 굽고 커피를 내린 뒤 볕이 잘 드는 발코니에서 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귀여운 할머니. 칠순을 훌쩍 넘긴 나를 상상해 본다. 그때 내가 이 글을 꺼내 읽는다면, 기분이 어떨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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