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이버링 Sep 27. 2024

기록된 고단함이 부러울 때

기록은 시간과 닮았다.

글재주가 좋은 사람은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도 글로 실감 나게 옮긴다. 아무리 힘든 순간을 묘사한 글도 재치가 묻어있어 우울하지 않다. 그런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고단함이 '잠깐' 부럽다.


"글 쓰는 게 짜증 나니까 그렇죠!"
그 짜증이라면 나도 잘 알았다. 같은 이유로 울어본 나라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장 그만 쓰자고, 글일랑 잊고 놀러 가자고. 하지만 나는 돈을 받고 고용되어 형제들의 아파트에 방문한 출장 글쓰기 교사였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그만 쓰자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가 여태껏 쓴 글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이야기했다.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작가에게 글이 잘 안 써지는 건 무척 괴롭고 짜증 나는 일일 텐데, 어린 제자의 짜증을 공감하며 담담하게 받아치는 재치가 돋보인다. 자신을 '돈을 받고 고용되어 형제들의 아파트에 방문한 출장 글쓰기 교사'라고 묘사하면서 그 일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니 '글쓰기 싫어 짜증 나지만 싫어도 해야 한다.'라고 덧붙이고 상황을 역전할 방법을 모색한다. 온갖 싫은 감정을 끌어모아 글쓰기의 괴로움을 부풀리는데 집중할 수도 있겠으나, '나도 쓰기 싫지만 별 수 없잖아.'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읽는 나는 스르르 미소 지으며, 그 짜증조차도 샘이나고 부러워진다. 나도 작가처럼 쿨하고 싶어서, 글쓰기가 아무리 짜증 나도 저렇게 쿨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김치찌개야."
"고기 많이 넣었어?"
"응, 두 근 넣었어. 김치보다 고기가 더 많아."
"오... 맛있겠다."

짭조름한 저녁을 먹고 나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찾고 또 서너 시간 지나면 야식을 먹는, 배고프면 화가 나는 남자. 키 183센티미터, 몸무게 90킬로그램. 내 아들이다. 집에서 얼큰새콤한 김치찌개를 먹어본 게 언제인지 모른다.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김치찌개에서 감자탕 맛이 난다. 사실은 고기찌개라고 부르는 게 더 맞다.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문하연


퇴근 후 집에 오면 아들이 날 보고 "엄마, 오늘 저녁 메뉴가 뭐야?" 묻는다. 그때마다 '내가 식당 이모냐?'라고 물으려다 만다. (늘 예쁘게 말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나는 이중인격자인가.)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라고 말하면 참치를 넣었는지 돼지고기를 넣었는지 서둘러 묻는다. 참치든 돼지고기든 그냥 차려준 대로 먹어주면 좋으련만, 자식은 클수록 몸도 자아도 내 키를 훌쩍 넘는다. 그래서 위 글을 읽었을 때 200% 공감이 됐고, (안 그래도 체구가 작고 비쩍 마른 문하연 작가님을 뵌 적이 있기에) 183센티미터, 몸무게 90킬로그램인 아들의 고기타령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김치찌개를 고기찌개라 부르는 게 더 맞다며 귀여운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잠깐 화제를 돌린다. '그래,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라고 한숨을 툭 뱉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내가 식당 이모냐?'보다 '그래,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가 더 쿨해 보인다. 너털한 웃음으로 화난 내 마음까지 녹여 버리는 글재주가 부럽고 샘난다.   


지인이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는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아서 연락을 못했다고 한다. 살면서 그런 친구들을 많이 봤다. 대체로 힘들면 그때그때 수다로 짜증을 연소시켜 버리는 나와 달리,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무슨 힘든 일이 있었냐 물으면 또 별 일 아니라 한다. '별 일도 아닌데 왜 연락 안 했어?'라고 묻고 싶지만 참는다. 지금은 별 일 아니라 말하게 됐지만 사실은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두절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누구에게 설명하는 것도 고통스러워 연락을 꺼렸을 것이다. 마음이 정리되고 스스로 별일 아니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러야 연락할 마음이 생길 테지. 그러고 보면 시간은 별일도 별일 아니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기록도 시간과 닮았다. 현장의 짜증과 한숨은 두통과 위염을 유발하고도 남을 만큼 덩치가 큰데 기록하면 두어 문단의 콩트로 둔갑한다. 콩트를 읽은 나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사를 연발하겠지.


'하! 진짜, 어쩜 이리 글을 잘 쓰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