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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by 새이버링



내 오래된 USB에 한글파일 한 개가 저장돼 있다. 풋풋한 이십 대였을 때 만든, 먼 훗날 출간할 원고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뭐라도 쓰다 보면 언젠가는 쌓이고 쌓여 책이 될 줄 알았지. 손님같이 찾아오는 생각을 모았다. 왠지 있어보여서, 한 페이지에 한 문장만 놓고 사진만 넣은 페이지도 있었다. 유치한 것도 있고, 언제 이런 생각을 했지? 싶어 미소가 절로 나오는 글도 있다. 그때는 막연히 바랐다. 희고 두툼한 양장 표지가 내 말랑한 생각의 역사를 고이 감싸는 그런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책으로 엮고 싶다는 꿈의 시작은 상상에서 비롯됐다. 좋아하는 이들에게 “내가 쓴 책이야.”하고 한 권씩 선물하는 상상, 쭈글한 손으로 손주들에게 “할미가 쓴 책이야.”하고 한 권씩 건네는 나를 상상할 때 마냥 행복했다. 받는 이의 호불호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내게서 나온 문장이 말끔하고 두툼한 종이에 인쇄된 것을 손으로 쓰다듬을 생각에 기쁠 따름이었다. 명품백은 도둑맞고 비 맞고 낡으면 슬플 것 같은데, 책은 몇 권이고 만들어낼 수 있으니 세월에 장사가 책 말고 따로 없지.


마흔이 넘고부터는 나와 내 주위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부 글감이길 바랐다. 시작이 있고 역사가 있는 경험들을 이야기로 대충 훑다가 결말에 다다를 자신이 없는 경험은 좀 더 묵혀두려고 서랍에 고이 간직한다. 나이와 함께 발효된 생각이 지혜로 거듭날 거라 믿기에. 시간은 효소다. 그래서 젊은이가 ‘깨달았다.’고 쓰는 지혜를 나는 50% 만 신뢰한다. 지금의 깨달음은 그저 궁극의 지혜로 향하는 간이역일테니.


간이역에서 만나는 감흥은 종착지에서 만날 지혜의 근거가 되므로 간이역에서 만난 반짝이는 순간들을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전라도 광주에서 서울까지 순간이동을 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기술이 생긴다면 나는... 멀미가 나서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동안 그런 기술은 발명되지 않기를 바란다.) 서둘러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고, 겸손히 ‘겨우 알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정거장에서 겨우 깨달은 의미를 차곡차곡 모아 내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날을 상상한다. 아직 완성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글쓰기는 근육과 같아서 쓰지 않으면 약해지니까 오늘도 이렇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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