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여한 없이 살다 감
나는 나 자신에게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천천히 정성 들여 내려 마시는 커피 한 잔이,
갑자기 마음에 꽂힌 예쁜 옷이,
괜히 집에 두고 싶어 산 꽃 한 다발이,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 집을 나온 시간이,
밑줄 긋고 싶었던 책 한 권이,
먼 곳에 사는 이를 만나러 끊는 값비싼 srt티켓이,
요리하지 않고 대충 시켜 먹는 저녁이,
혼자 있는 집에 튼 에어컨이,
비싸고 원단 좋은 양말과 속옷이,
샤워 후 바르는 향기로운 바디로션이,
길을 걷다 잠시 멈춰 찍는 사진이,
안주 없이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이,
가끔 나를 위해 사는 부라타 치즈가,
서두르지 않음이
재촉하지 않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음껏 게으른 시간이...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사라지지 않길
미루고 미루다 내가 포장을 뜯을 힘도 없이 늙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미리 정한) 묘비명: 여한 없이 살다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