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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두 갈래의 길

보험설계를 하다가 마주한 철학적인 질문

by 새이버링

내 나이 마흔셋,

실비보험이 없다는 내 말에 사람들 눈이 동그래졌다. 이 사실이 부끄러운 일인가? 만약 30세에 2만 원짜리 실비보험에 가입했다면 지금까지 312만 원을 납입했을 텐데, 그간 지출한 내 병원비는 어림잡아도 100만 원이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감사하게도) 그렇다면 나는 200만 원 이상을 번 것 아닌가.


그러나 마침내 나는 실비 보험에 가입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믿을 만한 보험컨설턴트 한 분을 소개받았다. 먼저 내 보험가입 현황을 점검했다. 내 보험은 20대에 엄마 친구가 들어준 종신형 암보험 두 개가 전부였다. 가족력도 없는 내가 암에 걸리거나, 먼 미래에 죽으면 큰돈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나를 전혀 흥분시키지 않았던 시절이다. 어른들이 좋다고 하면 좋은 줄 알고 가입했다. (당시 엄마 친구는 40대 후반으로 사망보험금에 관심이 높았던 것 같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 보험의 정체를 알고 적지 않게 놀라고 말았다.


이 보험은 보장이 상당히 엉성하지만(암도 골라서 커버가 되고 입원비도 4일 차부터 나오는 등...)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죽으면


무려 1억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1억.

1억..

1억...

조건은 단 하나, 내가 죽으면.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이 보험은 지금은 판매하지 않는 귀한 상품인데, 죽기 전에 해약하면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60대 초반 보험료를 완납한 뒤 즉시 수령할 경우 대략 4천만 원, 이후 놀라운 적립율로 이자가 불어난다고.) 요즘 보험은 대체로 소멸성이라는데 내 보험은 보장도 되고 원금 이상의 환급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죽기 전에 4천만 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죽은 뒤에 일억을 남길 것인가?


갑자기 철학적인 질문이 스프링클러처럼 쏟아졌다. 나는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죽게 될까, 모르고 죽게 될까? 살아서 4천만 원(혹은 그 이상)을 쓰는 게 좋을까, 죽어서 남은 이들에게 1억을 선물하는 게 좋을까?


보험 컨설턴트는 양심적으로 내게 그 보험의 해지를 권하지 않았다. 대개는 (더 좋은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보험을 자꾸자꾸 가입하게 만들어야 이득일 텐데(나도 그것을 예상했고), 바라던 바, 이 보험의 엉성한 것만 메우는 최소한의 보험을 설계해 주었다. 최근 들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삭신이 쑤시는 증상에 대비를 해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요즘 출퇴근길 유난히 잦은 교통사고를 지켜보며 가졌던 불안도 월 만 원의 운전자보험 가입으로 잠시 내려놓았다. 대체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나인데, 마흔이 넘고 보니 불투명한 미래가 슬슬 두려워진 것이다.


여전히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

죽기 전에 4천만 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죽은 뒤에 일억을 남길 것인가?


여러분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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