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전집? 최주이의 상상력은 대체 어디까지니... 그래, 준비는 잘 돼가?”
전화기 너머로 대학 동기 세희가 깔깔대며 웃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줄 단짝친구의 질문에 주이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며 답을 했다.
“음... 일단 상가를 구해야 되고... 아, 이게 또 전을 부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너 그게 뭔지 알아?”
“중요한 거? 김치?”
“김치는 익히면 웬만하면 다 맛있어. 김치전의 생명은 바로 뒤지개야. 내가 특별히 담양 특산품으로 공수한 뒤지개가 있는데..."
“야야! 너 설마 뒤지개 하나 들고 시드니에서 전집 차리겠다는 건 아니지?”
“뒤지개만 한국에서 챙겨가면 거기서도 필요한 건 다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호주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다 똑같지 뭐.”
“결제는 어떻게 하는데, 너 사업자 신고 이런 거 알아봤어? 세금은? 직장이니 외국에서 사업해도 돼?”
“그런 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나 예전에 워킹홀리데이 때 알았던 언니 오빠들이 시드니에 몇 명 있어. 물론 연락은 통 안 하고 살았지만...”
“담양에서 산 뒤지개 가방에 넣고 비행기 탄 네 모습, 상상만 해도 웃기다. 근데, 희한하게 또 너랑 어울려, 하여간 마음만 먹으면 엉덩이부터 들고 나서는 건, 대학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냐? 후훗.”
“내가 그랬나? 하긴 내가 계획보다 실행이 앞서서 문제긴 하지...”
“난 그게 너의 최대 무기라고 생각하는데? 20년 동안 내가 널 지켜보면서 깨달은 건데, 남들이 망설일 때 넌 제일 먼저 시도해서 실패하고 정답을 찾아냈어. 대학 때 전공과제할 때도 넌 일단 뭐라도 풀어서 선배들 찾아가고 교수님한테 물어보고 그랬잖아. 난 문제가 너무 어렵고 물어보기도 부끄러워서 혼자 끙끙 앓고만 있었는데, 여기저기 도움을 구하며 결국 과제를 해내는 네가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네 덕을 톡톡히 봤지. 그때 나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야! 임세희! 문제는 발로 푸는 거야, 머리로 푸는 게 아니라고.' 였잖아. 그 말을 내가 평생 못 잊고 산다. 근데 주이야. 그냥 전집이면 몰라도 시드니에 차리는 전집은 대박 날 것 같다. 네 핑계로 나 우리 딸 데리고 시드니 한 번 가야겠다, 재워줄 거지?”
“당연하지, 오기나 하셔.”
주이는 뒤지개를 등 뒤에 X자로 꽂고 시드니 한복판에서 전집을 물색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명절에 전 좀 잘 부치는 것과 낯선 외국에서 전집을 창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건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전을 팔 상가가 구해지면 그다음은 또 어떻게든 되겠지, 차근차근 산을 넘자는 각오였다.
인스타그램에 접속해서 한글로 ‘#시드니부동산’을 검색했다. 요새 웬만한 사업가들은 SNS 계정 하나쯤은 다 갖고 있으니 시드니에서 부동산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색 포털에서 검색하면 돈으로 매수한 뻔한 광고와 홍보 낚시글이 대부분이다. 직접 소통으론 SNS 만한 게 없다. 여러 게시물들을 살펴보다가 팔로워 1.5K를 소유한 여성의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호주 부동산 상식을 꼼꼼하게 정리한 계정이었다. 게시물 여러 개를 꼼꼼하게 살펴본 주이는 메시지(DM)를 보냈다.
주이_‘안녕하세요. 저는 시드니에 *take away(포장) 식당을 하나 차리고 싶습니다. 크기는 작아도 되는데 유동인구도 많으면서 금액도 저렴한 곳으로 추천받을 수 있을까요?’
유동인구는 많은데 금액도 저렴한 곳이라... 맛은 있는데 살은 안 찌는 분식이 뭐냐고 묻는 거랑 뭐가 다른가? 일단 전집을 차리고 싶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전집은 조리 시 냄새가 좀 나니 혐오시설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고, 어쩐지 전집을 차리겠다고 하면 호주에는 이미 한식당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초보 사업가로 보일까 봐 염려가 됐기 때문이다. 주이가 보낸 메시지에 즉시 답장이 왔다.
수지_‘네. 안녕하세요. 뭘 파실 건데요?’
주이_‘그걸 꼭 말해야 하는 거죠?’
수지_‘말해주셔야 해요. 상가 주인이 그걸 알아야 임대를 내주거든요.’
이름이 ‘최수지(Suji)’인 이 여성은 호주에서 약 20년 간 살았고, 본업으로 회사를 다니면서 부업으로 부동산 관련 중계일을 하고 있다고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자기소개, 전달력 있는 시드니 부동산 트렌드 등을 주제로 수십 개의 숏폼이 올라와 있었다. 보이는 게 전부인 인스타그램이지만 팔로워가 괜히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주이는 수지가 책임감을 갖고 자신을 도와줄 거란 확신이 들어 주문을 걸듯 짧게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 여자에게 시드니 전집의 운명을 베팅한다.’
주이_‘포장만 전문으로 하는 전집을 차릴 생각입니다. 시드니에 한식당은 많지만 전 포장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미 보내버린 메시지를 수차례 읽으며 주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창업 의도까지 밝힌 건 좀 TMI인가?’
메시지를 읽은 수지는 뭐라고 쓰려다 말았다. 인스타그램 대화창은 상대방이 메시지를 확인하면 ‘읽음’이라고 표시되고, 메시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 이모티콘이 꿈틀거린다. 그런데 ‘...’ 이모티콘이 잠깐 꿈틀대다가 멈췄다. 주이는 수지의 답장을 기대하면서 대화창을 빤히 쳐다봤지만 이모티콘이 멈춘 뒤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뭐지? 뭔가를 쓰려다 말았는데?’
주이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쓰려다 말았을까? 내가 그냥 찔러보는 사람처럼 느껴졌을까? 아니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전 파악하려고 내 계정을 둘러보고 있는 건 아닐까?’
수지의 답을 기다리는 1분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진 주이는 수지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그녀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살펴봤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를 팔로우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지.’
수지가 팔로우하는 계정들은 대부분 부동산 관련 계정이거나 요가&필라테스 등 운동과 관련된 계정이었다. 팔로우 계정이 100개도 채 되지 않아 금방 훑어볼 수 있었다. 5분이 지났지만 아직 수지에게는 답이 없었다.
‘벌써 부동산을 알아보느라 시간이 걸린 걸까? 아니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알아보겠다고 말을 해줘야 맞는 게 아닌가? 어쩌면 내가 애송이 같아서 바가지 씌울 궁리를 했을까? 아니면 내 인스타그램에 들어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뒤져봤을까? 돈이 안 될 것 같으니 대충 무시하려고 그런 걸까? 아니, 그런데 나는 일면식도 없는 이 여자의 무응답이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답을 하면 좋은 거고, 답이 없어도 그만이지. 다른 계정 찾아서 물어봐도 되잖아?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자꾸만 이 여자에게로 향한다. 나도 모르게, 자꾸.’
시간이 흐를수록 밀려오는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하던 그 순간,
‘…’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지_‘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근데, 대박인데요? 저도 전 진짜 좋아하는데, 제가 첫 번째 단골 할래요!’
수지의 메시지를 읽은 순간, 안절부절못하던 주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박인데요?’라니 상기됐던 주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기쁜 마음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답장을 썼다.
주이_‘감사합니다. 좋은 매물을 알아봐 주시면 꼭 사례하겠습니다.’
수지_‘최선을 다해 알아볼게요. 음...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매물이 많지 않고 나와도 금세 사라져요. 시티에서 멀지 않은 상가도 함께 알아볼게요. 맛있으면 찾아오겠죠. 비용은 어느 정도 생각하세요?’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매물만 알아보겠다는 수지의 응답에 주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뭔가 상상만 하던 것이 현실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기분은 주이가 최근에 느껴보지 못한 신선함이었다. ‘맛있으면 찾아오겠죠’라는 그녀의 말이, 불확실한 미래의 커튼을 활짝 걷어줬다. 그녀의 말이 맞다. 요새는 지나가다 맛있어 보이는 식당보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을 직접 찾아 나서는 시대니까. 그 한마디에 처음 대화를 나눈 수지를 향한 신뢰가 증폭됐다. 문제를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하는지 몇 마디 나눠보면 안다.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은 화법부터 다르니까.
시드니 부동산 시세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한 주이는 상가 임대료가 가장 마음이 쓰였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세를 알아본 적도 없기에 막연히 돈이 많이 들겠거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이는 수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물었다.
주이_‘포장 전집을 할 만한 시티 쪽 점포는 임대료가 대략 얼마나 하나요?’
수지_‘지금 올라온 매물만 살펴보고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주이는 갈증이 나서 냉장고에 있는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약 10분 뒤 수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지_‘여기가 5평 정도인데, 공간이 좁긴 해도 최소 월 $5,000은 내셔야 할 거예요.’
주이는 수지가 보낸 사진을 보고 금세 여기가 어딘지 알아챘다. 시드니 시티 한복판에 있는 상가였다. 사진 구석에는 주이가 두 달 살기를 하면서 즐겨 갔던 서점이 보였다. 주이는 사진을 요리조리 확대해 봤다. 분명 손님을 위한 홀도 바깥 테이블도 없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다. 커피를 내리고 손만 씻을 정도의 손바닥만 한 공간인데 월에 5000불이라니. 지금 환율로 어림잡아 450만 원이나 되는 금액이었다. 주이는 한참 동안 답을 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전을 몇 장 팔아야 임대료를 갚고 이익을 낼 수 있을까? 전 한 장에 $5쯤에 팔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을 하루에 50장을 팔아야 겨우 본전이라는 말인데...’
주이는 그제야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이 섰다. 예상 밖의 장애물에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오한이 들었다. 주이는 어깨를 한없이 좁게 웅크린 채 답장을 보냈다.
주이_‘더 저렴한 매물은 없을까요?’
수지_‘인스펙션은 직접 하실 건가요?’
호주에서 렌트나 임대를 알아볼 때 인스펙션(Inspection)이라는 것을 하는데, 공간을 직접 확인하고 계약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수지가 보낸 사진만으로 덜컥 결정할 수 없으니, 후보를 세 군데로 좁혀주면 인스펙션은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이틀쯤 지나 그녀에게 답장이 왔는데 알려준 매물들은 하나같이 임대료가 비쌌고, 주이는 계속해서 ‘더 저렴한 곳 없나요?’를 물어야 했다.
주이의 성가신 부탁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조율 끝에 수지는 세 군데의 매물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가격이 낮아질수록 매물은 시티에서 멀어졌다. 구글맵을 켜고 수지가 알려준 매물들의 위치를 살폈다. 서리힐즈 상가, 뉴타운 상가, 서큘러키 뒤편 골목. 어딘지 대강은 알겠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주이는 수지가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맛있으면 찾아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