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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차가운 비행기 속 승객들은 시드니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보였지만 주이의 머릿속에는 그들과 차원이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시장조사가 성공하면 휴직기간 동안 시범적으로 전집을 운영해 보고, 사업이 번창할 가능성이 보이면 과감히 사직서를 낼 생각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좌석 앞 간이 테이블을 내렸다. 가방에서 꺼낸 노트 표지에 <시드니전집 프로젝트>라고 네임펜으로 큼지막하게 썼다. 시드니로 향하는 하늘 길 위에서 이 노트는 빼곡하게 채워질 것이다. 판매할 전 목록과 설명, 재료, 가격 등이 포함된 메뉴판 아웃라인을 그렸다. 전집을 차리기 위해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지, 포장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나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집을 차릴 상가다. 곧 시드니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상가에 대한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전집을 차려야겠다고 결심이 서니 못할 이유도, 안 될 이유도 없어 보였다. 돈이 부족하면 마이너스 통장과 퇴직금 정산이라는 카드도 있지 않은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으로 주이는 깜깜한 하늘 위에서 전집을 차리면 해 보고 싶은 일들을 뭉게뭉게 그려 나갔다.


‘가볍게 한 끼 때우기 좋은 크기, 식감 좋은 두께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예쁜 포장지를 준비하자. 선물용으로 손색이 없을 거야. 고소한 전 냄새가 시드니를 진동하게 해야지. 혹시라도 2호점, 3호점 문의가 오면 컨설팅비는 얼마나 받을까? 3개 이상 포장해 달라고 하면 할인도 해줄까? SNS에 홍보 문구를 뭐라고 올리지? 전집 이름을 영어로 지을까? 위치는 실내보다는 야외가 낫겠지? 바깥에 간이 의자와 휴지통도 준비할까? 물티슈랑 키친타월도 챙겨야지. 외국인이 내 전을 맛있다고 칭찬할 때 나도 능수능란하게 응대하려면 영어공부 좀 해야겠는데? 갑자기 손님이 몰려서 줄이 길어져도 나 혼자 감당할 수 있으려면 주문 시스템을 만들어야겠어. 아르바이트생은 외국인으로 써 볼까? 아니지, 소통이 답답하면 불편할 거야. 워킹홀리데이를 온 학생이 좋겠다. 딜리버리도 하면 좋겠는데? 전집이 잘 되면 내가 우리나라의 전을 홍보하는 멋진 홍보대사가 될 수도 있어. 사람들이 전집에 왔다가 SNS에 입소문 내주면 유명해지지 않을까? 아니다, SNS 후기 이벤트도 해야겠다. 이러다 한국정부에서 표창장이라도 받는 것 아냐? 잘하는 일로 돈도 벌고 애국도 하고 일타쌍피 일거양득이 아니고 뭐겠어.’


주이 옆에는 그녀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아저씨가 코를 곯고 있었고, 빽빽한 콩나물시루 같은 저가 항공의 좌석에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마음속에선 이미 한국을 빛낸 애국자가 되어 퍼스트클래스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계획들을 쓰고 또 쓰느라 10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 채 시드니 상공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여름이 떠나지 않은 3월의 시드니는 흥분되고 활기찼다. 3일 간 묵을 숙소에 짐을 맡기고 하이드파크를 가로질러 타운홀 앞 KFC에거 걸음을 멈췄다. 맛집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국적이 다양한 젊은이들이 곳곳에서 버스킹을 하느라 시티가 소란스러웠다. 주이는 마치 어제까지 이곳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최주이 씨?”


누군가 주이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아, 네! 혹시 수지님?”

“분홍색 에코백... 긴가민가 했네요, 시드니엔 언제 오셨어요?”

“오늘 아침에요.”

“오늘 아침에요? 엄청 피곤하시겠는데요? 얼른 가시죠. 제 차로 모실게요!”


주이는 ‘타운홀 KFC앞에서 오후 3시에 분홍색 에코백을 메고 있겠습니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수지는 자연스럽게 태닝 된 피부에 큰 키, 금발이 살짝 섞인 긴 생머리를 소유한 여성이었는데 연예인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낯이 익었다. 외국에서 오래 산 한국인이 갖게 되는 흔한 외모의 믹스쳐였다. 첫 만남의 서먹함을 느낄 새도 없이 주이는 빠른 걸음으로 수지의 뒤를 따랐다. 도로 옆 기기에서 주차비를 정산한 수지는 파랗고 단단한 혼다 SUV에 타라고 손짓했다. 자동차의 단단함이 용감하고 적극적인 그녀의 성향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비 온 뒤 편백숲에서 날 법 한 향기가 주이의 온몸을 감쌌다. 10시간 비행의 피로를 한방에 날리는 향이었다. 수지는 이마 위로 올렸던 선글라스를 내려 끼고 주행을 시작했다.


“향이 좋죠? 최근에 방향제를 바꿨는데 차를 타면 숲 속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어머, 저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는데, 10시간 비행의 피로가 확 가시는 것 같네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수지가 어색할 틈도 없이 물었다.


“일단 뉴타운 먼저 가시죠.”

“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퇴근하고 온 거니까 괜찮아요.”

“퇴근요? 회사에 다니세요?”

“네. 월급만으론 부족해서 퇴근하고는 부동산 일도 좀 하고 있어요.”


수지는 우리나라와 반대라 익숙지 않은 도로에서 능숙하게 좌회전 핸들을 돌렸다. 분명 우회전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좌회전을 하는 수지를 보며 주이는 감탄했다.


“대단하시네요. 투잡이라니...”

“네. 뭐든 배우는 건 도움이 되니까요, 전 마케팅 회사에 다니는데요, 프랜차이즈 브랜드 마케팅을 하고 있어요. 외근도 많고 일은 힘들지만 배우는 것도 많고, 고객들 만나는 게 즐겁고 좋아요. 부동산 일은 회사 선배한테 배워서 시작하게 됐어요.”

“회사 선배가 투잡을 했나요?”

“네, 선배가 저를 이 길로 인도했으니 그런 셈이죠.”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네요.”

“왜요?”

“선배가 후배한테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 잘하라고 가르쳐야지, 투잡 하라고 가르치진 않으니까요”

“지금 하는 일은 업무시간에 잘하면 되고, 부업은 퇴근하고 잘하면 되잖아요?”

“맞는 말인데, 한국에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런데 제 선배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어요. 코로나로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이 활기를 찾으면서 부동산으로 대박이 났죠. 저도 그 뒤를 밟고 싶어요.”


주이는 수지의 등 뒤로 비추는 햇살이 마치 수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로 착시했다. 다니는 회사에 만족하지 않고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을 호주에서 만나다니, 벌써부터 시드니에 전집 프로젝트가 걱정이 됐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을 보면 주눅이 들곤 했다.

수지는 속도를 낮추고 한적한 도로에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려 휴대폰으로 주소를 체크한 뒤 낡은 상가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이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락스냄새가 주이의 코를 찔렀다.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수지는 뒤를 따라 걷던 주이를 보고 손가락으로 점포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에요.”


걸음을 멈춰 수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주이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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