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매물인 뉴타운 상가는 미용실, 안경점, 패스트푸드점등이 입점한 중소형 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다. 주위에 Westpac 은행이며 병원이며 상가들이 즐비해 있어서 점심 때는 전이 제법 팔릴 듯했다. 다만 주이는 기름 냄새가 이 건물 복도 전체에 진동하는 참사는 막고 싶었다. 건물 안 복도는 폭이 좁았고 점포는 건물 안으로 상당히 걸어 들어가야 했다. 주이는 처음부터 수지에게 냄새 때문에 야외 점포를 선호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게다가 최악인 것은 긴 시간 서서 전을 부칠 주이의 시선이 꽃집도 아닌 남자화장실 입구를 향해 있었다. 화장실에 얼마나 락스를 뿌려댔는지, 두 사람 다 락스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두 번째 매물인 서리힐즈의 상가는 브런치 가게에 인접해 있었다. 서리힐즈는 브런치 카페가 많고 아기자기한 골목이 예뻐 여행자들이 일부러 찾는 명소지만 번화가와는 거리가 제법 멀어 붐비는 지역은 아니라고 했다. 주이는 점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빽빽이 늘어선 오래된 주택가와 그 앞으로 알록달록한 쓰레기통이 보였다. 시원한 그늘도 좋고 떨어지는 나뭇잎도 운치가 있어서 그 앞 벤치에서 커피 한 잔과 여유를 부리기엔 적절해 보였다. 상가 문을 열고 점포 내부를 살폈다. 폭은 좁지만 안으로 깊게 난 공간에 작은 개수대 하나가 보였다. 그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포대자루 하나가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주이를 보며 수지가 서둘러 말했다.
“아, 여긴 이전에는 개인 마사지샵을 했던 곳이래요.”
“그렇군요.”
석면냄새가 났다. 하얗고 건조한 공간이 마사지샵을 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마침 고개를 들어 높은 천장을 보니 작은 샹들리에가 보였다. 점포 깊숙한 곳부터 빠르게 살핀 주이는 걸어 나오며 수지에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커피를 만들면 몰라도, 전을 부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네요.”
마지막 희망이었던 서큘러키 근처 점포는 최근 리모델링을 마쳐 깔끔하고 단정했다. 검은색 벽돌과 창틀이 세련돼 보였고 바깥으로 보이는 맞은편 카페의 외관이 주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곳에 서서 전을 부치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2-3분만 걸어 골목을 벗어나면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보이는 최적의 입지조건이었다. 수지는 이 점포가 주에 2,000$에 매물로 나왔다고 말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임대료에 주이는 월세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수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여긴 좀 비싸긴 하지만, 이런 곳도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여기선 제가 대체 전을 몇 장 팔아야 임대료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주인은 근처에 상가 대여섯 개를 보유한 젊은 중국인이에요. 일 안 하고 임대료만 받아도 충분히 부자죠.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 너무 괜찮죠?”
“와... 그런 사람도 있다니, 전 그저 부럽기만 하네요.”
주이는 입술을 오므리고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수지가 돌연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시드니에 언제부터 전집을 차리고 싶었던 거예요?”
예상치 못한 수지의 진지한 물음에 주이는 잠시 멈칫했다.
‘제가 17년 전에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 그때부터 꾸었던 꿈이에요.’
머릿속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초면인 수지에게 기나긴 히스토리를 말할 기운이 없었다. 고작 어릴 적 꿈이나 이루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이해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머뭇거리던 주이는 적당히 둘러댔다.
“작년에 여행 왔는데, 시드니엔 전집이 없더라고요. 제가 전을 좀 잘 부치거든요.”
수지는 왜인지 기대했던 답이 아니라는 듯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둘러본 세 개의 매물은 주이의 성에 차지 않았다. 매물을 전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고객을 보면 기운이 빠질 만도 한데, 수지는 오히려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파랗던 하늘에 어느새 핑크색 노을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곳저곳 이동하며 매물을 보여주느라 수고한 수지를 위해 주이는 미리 지인의 추천을 받아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예약할 때만 해도 근사한 곳에서 스테이크를 맛보며 시드니 전집 상가 계약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 상상했다. 기대한 시나리오와 달리,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주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드니 시티의 세련된 골목과 행인마저 쓸쓸해 보였다. 수지는 어색한 적막을 깨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Greenday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주이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예약 요청사항 대로 테라스 좌석을 배정받은 두 사람은 1kg 토마호크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웨이터는 샐러드와 함께 주이 앞에는 샴페인, 수지 앞에는 맥주 한 잔을 내려놓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가볍게 웃으며 잔을 부딪혔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수지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인스타그램 알림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주이는 정신을 차린 듯 적막을 깨고 수지에게 물었다.
“수지 씨는 인스타그램 관리를 참 잘하신 것 같아요. 팔로워도 많고요.”
주이의 기습 질문에 수지는 입술을 씰룩이며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부동산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저에게 이 일을 알려준 선배가 고객을 모으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어요. 저처럼 사무실도 없는 프리랜서에게 고객이 제 발로 찾아올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인플루언서가 될까를 고민했어요. 인플루언서들의 패턴을 분석해 봤죠. 어떤 식으로 팔로워를 모으고 상호작용 하는지를 분석하고 따라 해 봤어요. 근데 희한하게도 그 방법들은 죄다 불편하더라고요. 후킹을 위해 핵심을 포장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더라고요.”
“알 것 같아요. 요즘 인플루언서들이 하는 특유의 말투나 극단적인 자신감, 사실 보는 사람은 불편해요. 신기하게도 불편하면서도 그걸 계속 보게 되는 거죠.”
“정확히 아시네요. 후킹 없이 팔로워 유입은 힘들어요.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서 팔로워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치트키를 발견했어요.”
“치트키요?”
“네. 돈을 좀 썼어요. 아, 그런데 돈으로 팔로워를 산 건 절대 아니에요.”
치트키라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뜬 주이를 보며 수지가 손사래를 쳤다. 마침 건장한 웨이터가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가 나는 돌판을 서빙했다. 고기 위로 허연 연기가 났다. 잘 익은 토마호크의 불향이 두 사람의 허기를 자극했다. 스테이크 해체쇼라도 되는 듯 양손에 칼을 들고 현란하게 움직이며 쓱싹쓱싹 썬 고기를 각자의 접시에 배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이는 저절로 손이 포크를 향했다. 그 순간 갑자기 ‘풉..’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지가 주이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빙을 마치고 사라지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건넨 주이가 입을 열었다.
“이 와중에 배고픈 제 모습이 갑자기 웃겨서요.”
수지는 그제야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고는 저도 따라 웃으며 잔을 들었다. 둘이 먹기엔 제법 많은 양이었지만 둘은 상당히 배가 고팠다. 사실 이것이 오늘 주이의 첫 식사였다. 주이가 타고 온 비행기는 기내식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 덕에 거의 24시간 만에 식사를 하는데 배고프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상가 인스펙션에 몰입한 나머지 배고픔도 잊었다가 긴장이 풀리니 심하게 허기가 찾아왔다. 그을린 고기는 육즙이 입천장에서부터 혀 전체로 쏟아지면서 부드럽고 쫄깃한 맛을 냈다. 전집 창업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으나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는 대성공이었다.
“이 집 스테이크 진짜 죽이네요. 전 20년을 호주에 살면서 여기에 이렇게 맛있는 스테이크집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정말요? 여기 레스토랑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맛있다고 하셔서 저도 기쁘네요, 스테이크가 오늘 저를 살렸어요. 하하... 참, 아까 말한 치트키는 뭔데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비밀이라도 되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비싼 수강료를 내고 강의를 들었어요. 이 강의는 비싼 만큼 전담매니저까지 배정되는데, 매니저가 제 필살기를 분석해서 제가 잘할 수 있는 방식을 코칭해요. 그 과정에서 저에게 잘 맞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혼자 백날 해 봐야 안 되는 걸 속성으로 배운 거죠. 이 강의를 수강하는데 투자한 수백 만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결국 돈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깨달았고요.”
“수백이요? 돈으로 시간과 수고를 샀군요?”
“그게 핵심이에요. 타인의 능력을 지렛대로 활용해 더 높이 뛰어오르는 레버리지예요. 재주가 상품이 되는 시대니까. 제가 몇 년 간 분석하고 고민한 것들이 강의 교재로 이미 나와 있더라고요. 혹시 서핑해 본 적 있으세요? 서핑할 때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을 등지고 몸을 맡겨야 더 멀리,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거든요? 파도가 돕지 않으면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멀리 나아갈 수 없어요. 전담매니저는 제게 파도가 되어준 셈이죠.”
수지는 자신이 생각하는 레버리지 철학에 대해 길게, 힘주어 설명했다. 주이는 그동안 자신이 파도와 관계없이 그저 앞만 보고 헤엄친 바보같이 느껴졌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온 삶에 파도타기란 없었다. 파도와 지렛대. 주이는 마음속으로 계속 그 두 단어를 중얼거렸다.
“자격증 강의도 아니고, 인플루언서가 되는 강의라니... 신박하긴 하지만 또 선뜻 내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용기가 대단하네요.”
“이제 그 강의가 예전만 못하다고 들었어요. 2년 전만 해도 전담 매니저의 코칭이 쓸모가 있었거든요? 근데 이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덤벼드니까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그만큼 희소성이 떨어졌죠. 그때 제가 그 파도를 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결정은 망설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모든 건 다 때가 있더라고요. 주이 씨처럼요. 시드니에 전집을 차려 볼 생각을 한 주이 씨의 생각, 대단해요. 세상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보험만 성실하게 넣고 다가올 위기를 태풍처럼 두려워하면서 살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월급에 만족하면서 시간과 파도에 휩쓸려 산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육아휴직까지 내고 여기 온 건데, 역시 이런 일은 용기만 낸다고 되는 게 아니었네요.”
“그런 말 말아요. 지금 주이 씨에게 특별한 기운이 느껴져요. 제가 대학 다닐 때 동아리에서 명리학 공부를 좀 했거든요? 근데 그때 배운 지식이 사람을 대하는 직업에서 쓸모가 좀 있어요.”
“명리학이면.. 사주 같은 거예요?”
“음... 운이란 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주기가 있는데요,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주이 씨에게 지금 아주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거예요. 운이 바뀌고 있는 징조... 랄까요?”
“하하... 진짜요? 다르게 살고 싶다고 마음먹어서 그런가, 기분은 매우 좋네요. 오늘 본 인스펙션이 하나라도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망하는 기색의 주이와 달리 수지는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 어쩌면 수지는 처음부터 주이가 마음에 드는 매물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한 조각의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수지가 냅킨으로 조심스레 입을 닦고 오른손을 턱에 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긴 한데...”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빛 뒤로 어느새 어둠은 노을을 밀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