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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조은 한인교회

by 새이버링

주이는 시드니에 오기 며칠 전 페이스북을 통해 혜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7년 전 시드니 한인교회에서 처음 알게 된 혜선은 호주에서 영주권을 받고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 근황을 보긴 했지만 ‘좋아요’만 누를 뿐 별다른 소통이 없었다. 혜선은 한때 아꼈던 동생이 시드니에 온다는 소식에 반가워하며, 일요일에 교회에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주말을 껴서 단 하루 휴가를 내고 시드니에 왔기 때문에 일요일 밤에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다음 날 주이는 서둘러 숙소 체크아웃을 한 뒤 로비에 짐을 맡기고 ‘더조은 한인교회’로 이동했다. 호주에서 짧은 일정의 마지막 하루, 혜선을 반드시 만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혜선은 주이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예배 후 목사님, 사모님을 비롯한 몇몇 성도들과 비빔밥을 먹으며 교제를 나눴다. 혜선은 예배 후 열리는 구역 모임에 주이를 초대했다. 모임에 둘러앉은 여섯 명의 성도들 앞에서 주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기 위해 방문한 의도를 밝혔다. 주이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혜선은 마치 준비했다는 듯 성도들에게 하나씩 과제를 부여했다.


“박필용 성도님, 제가 아끼는 우리 자매님이 시드니에서 1년 동안 지내야 하니까 학생비자랑 아이들 공립학교 입학에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죠?”

“물론이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려면 엄마가 학생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어학원을 등록하는 게 제일 비용이 적게 들어요. 그리고...”


구역장인 혜선은 이미 주이가 시드니에 오기 전부터 성도들과 주이의 정착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뒤이어 교회 사모님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반소희 집사님이 뉴잉턴에 있는 아파트에 사시는데 아드님 교육 뒷바라지로 다음 달부터 1년 간 뉴질랜드에 가 계실 예정이래요. 오늘 아주 잘 찾아오셨는데요?”

주이는 사모님의 소개로 그날 오후 반소희 집사님의 가정에 방문해 집을 둘러보고 좋은 가격에 가구가 갖춰진 아파트를 렌트했다. 속전속결이었다. 시드니에서 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 들었던 주이는 어려움을 체감할 새도 없이 뷰까지 훌륭한 아파트를 구했다. 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학부모 운영위원인 박필용 성도님으로부터 아이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와 비자 정보까지 상세하게 소개받았다. 주이는 앞으로 다닐 교회가 정해졌음은 물론 주일마다 요리 봉사까지 하겠다고 기쁜 마음으로 약속했다.

"근데, 주이야. 너 어제 인스펙션 보러 간다더니 상가가 잘 구해진 거야?"

"언니, 실은 나, 어제 이 시간까지만 해도 전집 못 차리는 줄 알았잖아. 근데 완전 극적으로 전집 차리게 됐어. 언니 들으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

"진짜? 뭐,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

"내가 어제 본 매물이 하나 같이 비싸고 전집을 차리기엔 뭔가 다 부족했거든. 결국 인스펙션 본 건 다 실패였어. 그런데 '수지'라고, 나에게 매물 보여준 여자가 글쎄..."


***

“방법이라뇨?”

주이는 먼저 본 세 개의 매물 말고 또 다른 매물을 숨겨 놓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지를 쳐다봤다.

“음...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돌려 말하는 걸 잘 못해서요.”

“그럼요.”

지체하지 않고 대답하는 주이의 마음속은 불안과 기대로 가득 찼다. 누군가 ‘솔직하게 말해도 돼?’고 물었다는 건 상대의 말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예고다. 이런 예고를 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적군 아니면 아군.

“음... 제가 느낀 바로는 주이 씨가 기대하는 비용과 현재 시드니 부동산 시세의 갭(gap)이 너무 커요. 게다가 이민을 생각하시는 것 같지도 않고, 사업 경험도 없으신 것 같고요...”

주이는 정돈하지 않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서둘러 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듣고 싶었다. 수지는 주이에게 희망회로를 돌리기 위해 밑밥을 까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잠시 시계를 살핀 뒤 맥주 한 모금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 작은 아버지가 시드니에서 한식당을 운영하세요. 그런데 작은 어머니가 최근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지난주에 한국에 가셨어요. 아시다시피 시드니는 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잖아요. 병원 시설이나 서비스는 한국병원이 최고라면서, 하루라도 빨리 치료받자고 급하게 출국하셨어요. 음... 그래서 운영하시던 한식당은 기약 없이 문을 닫은 상태고요. 건강이 좋아지면 금방 돌아오실 거라 생각했지만, 저희 아버지 말씀으로는 치료가 간단치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수지는 갈증을 느꼈는지 맥주 한 잔을 모두 비웠다. 한 잔 더 하겠냐는 주이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은 수지는 웨이터를 불러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주이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보이는 수지가 아군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작은 아버지는 30대에 작은 어머니와 호주에서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한 번도 쉰 적이 없으세요. 원래는 시티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서 카페를 하셨는데, 그곳에서 장사가 꽤 잘 돼 카페를 정리하고 시티에 한식당을 차리셨어요. 2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못 가고 일만 하시더니, 결국 작은 어머니 건강신호에 불이 들어온 거죠. 이쯤 되면 일을 멈출 만도 한데, 중요한 건 작은 아버지는 식당을 정리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시다는 거예요.”

“직접 일군 사업체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분이군요.”

“맞아요. 솔직히 그 식당은 매물로 내놓으면 진짜 좋은 가격에 팔릴 만큼 입지가 좋거든요. 제가 이제 벌 만큼 버셨으니 좀 편하게 지내시라고 가게를 매도하시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제안드렸는데 요지부동이세요. 서론이 좀 길었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지금 비어있는 작은 아버지의 한식당에서 전을 팔아볼 생각은 없으세요?”

주이는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마음속 뿌연 안개가 걷히면서 들뜬 세포들이 일제히 ‘난 이제 살았다.’ 합창을 외치는 듯했다. 수지는 주이의 심장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걸 충분히 안다는 듯이.

“물론 작은아버지가 허락하셔야겠지만 가게를 비워두는 것보단 잘 이용해서 임대료를 조금이라도 받는 게 작은아버지께도 이득일 테니 그건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작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거기서 전을 팔면서 천천히 좋은 매물을 알아보시면 되죠. 게다가 업종이 식당이니 별도 사업자 등록도 필요 없을 것 같고, 포장판매만 하신다면 가게 공간을 많이 차지할 필요도 없겠죠? 세금이랑 임대료 같은 제반사항들만 주이 씨가 처음에 고려했던 예산 수준으로 검토해 볼게요. 위치가 워낙 좋아서 맛만 있다면 전은 엄청 잘 팔릴 걸요?”

“위치가 어딘데요?”

“패디스마켓 근처예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시드니의 중심가 패디스마켓. 여행자라면 빠짐없이 들러 쇼핑하는 곳. 차이나타운을 끼고 있어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 이곳은 워낙 중심가라 주이가 렌트를 고려한 적도 없는, 핵심상권이었다. 주이에게 운이 바뀌고 있는 징조가 보인다고 말하던 수지는 언제부터 이 카드를 들고 있었던 것일까? 수지는 주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유로웠다. 마치 주이가 시드니에 전집을 반드시 차리게 될 거란 확신이라도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들이 주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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