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재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폐가 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 촬영의 중심이 될 과거에 유명했던 배우 최재수와 어색한 인사를 나눌 때 주이의 얼굴은 이미 빨개져 있었다. 열일곱의 주이는 마흔둘이 됐을 때 자신이 그토록 열광했던 배우를 한국도 아닌 시드니에서 만나게 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주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매너 있게 인사하는 최재수는 주이가 열일곱 살이던 시절 그토록 마주하고 싶었던 스타였던 것이다.
최재수는 주이가 중학교 때 즐겨보던 하이틴 드라마 조연배우로 데뷔해, 광고모델이나 영화배우로 장르 가릴 것 없이 큰 인기를 누리다가 마약 혐의로 순식간에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춘 배우였다. 제니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니 그녀가 최재수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당시 최재수는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판단이 어려운 상태에서 친한 아이돌 B군의 권유로 마약을 하게 됐는데, 다음 날 깨어나보니 함께 있던 B에게 원한을 품은 여배우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후문이 있었다. 쌍꺼풀 없는 눈웃음이 선량해 보였던 그가 마약이라니 B야 워낙 소문이 많았다 치지만 최재수는 순수하고 솔직한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골수팬들의 실망이 컸다.
주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갈색 머리에 눈웃음이 귀여운 그는 사춘기 주이의 꿈에 단골로 등장했다. 당시 유행이던 끝이 쭈뼛한 헤어스타일과 웃을 때 깊이 파이는 보조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가 출연하는 하이틴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주이의 아빠가 뉴스로 채널을 바꾸면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내며 시위를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기 무섭게 시내에 나가 최재수의 브로마이드나 엽서를 사쟁였다. 주이는 반에서 ‘최재수 와이프'로 통했다. '토니와이프'로 불리던 유정, '우혁와이프'로 불리던 지혜와 사이좋게 지낸 이유도 실제로 H.O.T. 의 토니와 우혁, 최재수가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학급에서는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가장 많은 돈을 쓴 사람만이 'OOO 와이프'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브로마이드 몇 장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엄마 몰래 급식비와 교재비를 빼돌려 모은 돈은 주이가 '최재수 와이프' 타이틀을 유지하는 데 들인 돈만 해도 어림 잡아 수 백만 원쯤 됐을 것이다. 최재수가 마약 혐의로 활동을 중단했을 때 주이는 절대 우리 오빠가 그럴리는 없다며 방에 갇혀 식음을 전폐하고 와이프보다 극심한 열병을 치렀다. 주이의 엄마는 딸을 고통 속에 가둔 최재순가 뭔가 하는 놈의 흔적을 모조리 불태웠고, 주이는 성인도 되기 전에 혹독한 이혼의식(?)을 치렀다. 시간의 마법이 그렇듯 대학생이 되고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최재수는 주이의 기억 속에서 흐려져 갔다. 최근 주이는 우연히 SNS에서 “25년 전 최고의 인기배우 최재수, 쿠팡맨으로 일하며 월세내고 있어요.”라는 근황을 접했다. 그의 환한 눈웃음과 보조개 딸린 미소는 여전했다. 마흔일곱의 그가 쿠팡맨이라니, 딱한 마음이 든 주이는 능력이 된다면 일자리라도 마련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최재수가 시드니 전집의 일일 사장으로 출연해 재기를 준비한다니, 놀랍게도 그의 재기를 도울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는 생각에 주이의 손에서 땀이 났다.
수많은 스태프들이 주이와 최재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등에서 땀이 났다. 최재수는 공백이 길었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배우는 배우였다. 떠는 기색 하나 없이 감독을 비롯한 스텝의 요구를 성실하게 따랐다. 작가가 미리 정한 상황설정과 대본도 잘 소화해 냈다. 이제 주이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촬영은 지체 없이 시작됐고 주이는 대본에 따라 가장 먼저 육전 만드는 방법을 최재수에게 설명했다.
“보통은 밀가루를 그냥 쓰는데, 이렇게 밀가루를 채에 받쳐 곱게 만들어서 소고기에 묻히면 밀가루가 뭉치지 않아요. 그럼 전이 더 고소하고 식감이 좋아요.”
“아, 그냥 계란만 묻히는 게 아니군요? 이걸 매번 직접 하시나요?”
“손님이 없을 때는 저 혼자서도 할 만 한데, 손님이 많아지면 힘드니까 결국 아르바이트생을 구했죠.”
주이는 슬쩍 제니를 쳐다봤다. 최재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주이를 향해 채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주세요, 저도 한 번 해 볼게요.”
그는 주이가 했던 대로 흉내를 냈지만 서툰 손짓 탓에 밀가루가 채 바깥으로 튀면서 입고 있던 앞치마와 주위에 밀가루가 묻었다. 오른편에 서서 그를 지켜보던 주이는 힘조절이 안 되는 최재수의 건강한 오른쪽 팔목을 저도 모르게 지그시 눌렀다. 채를 탁탁 치는 그의 손목이 주이에게 경고를 받으니 움직임이 안정 돼 밀가루가 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최재수의 손목을 건드린 주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멋쩍은 마음에 어색함을 수습하려 넉살 좋게 박수를 치며 대본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오, 제법인데요? 이제 잘하시네요. 아, 그리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전을 다 부치고 난 뒤 바로 손님에게 주는 것보다는 30초 정도 한 김 식혀서 내어주면 바삭하고 맛.....(콜록콜록) 있어요.”
“아 목이 타세요? 여기, 물…”
주이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너무 떨린 나머지 아직 진도도 안 나간 순서까지 당겨서 설명하느라 목이 바짝 타들어 결국 사레가 들렸다. 최재수는 밀가루를 거르던 채의 손잡이를 손에 쥔 채로 냉장고 속 생수병을 꺼내왔다. 그 바람에 채에 묻은 밀가루가 바닥 이곳저곳에 튀어 바닥은 금세 엉망이 됐다. 주이는 미리 준비한 대사들을 적시에 자연스럽게 꺼내지 못했고, 긴장한 탓에 발음이 샜으며 말이 빨라져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긍께... 이건 전라도 사투리죠? 사장님 그 말하실 때 엄청 귀여운 거 아세요?”
최재수는 감독과 어떤 사인을 주고받더니 전을 부치는 도중 주이의 전라도 사투리를 흉내 냈다. 주이는 어색한 사투리가 부끄러워져 자신의 빨개진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을까 봐 마음이 쓰였다. 사투리를 안 쓰려고 노력할수록 억양은 더 이상해졌다. 주이는 할 수만 있다면 촬영을 멈추고 싶었다. 점점 가게 곳곳의 카메라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촬영을 허락한 이상 그만하고 싶다고 아이처럼 떼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감독이 잠깐 쉬는 시간을 갖자고 신호를 보냈다. 최재수는 기지개를 켜더니 양팔을 위아래로 스트레칭하며 주이에게 다가갔다.
“촬영, 힘들죠?”
“네. 이게 TV로 보는 것만 쉽지, 촬영하는 건 너무 긴장되네요. 자꾸 실수해서 죄송해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차라리 그냥 아는 오빠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세요.”
주이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오빠라니... 얼마 만에 불러보는 ‘오빠’인가. 마음속으로 ‘재수오빠...’라 불러보고는 혼자 쿡쿡 웃었다. 학창 시절 주이가 ‘재수오빠’라고 발음할 때 친구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야, 재수오빠라고 부르는데 왜 재수 없다고 들리냐? 하하하..”)
아직 역할이 크게 없는 제니가 포장해 온 아이스라테 한 잔을 주이에게 건네고는 속삭였다.
“사장님, 더우시죠? 제가 괜히 이걸 한다고 해서 너무 고생시켜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해요.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사장님 좋아하시는 오트밀크로 주문했어요.”
“아, 단비 같은 커피네요. 고마워요. 나 너무 어색하죠? 방송 망칠까 봐 걱정 돼 죽겠어요.”
“아니에요, 잘하고 계세요. 사장님! 파이팅!”
양손을 꾹 쥐고 주이에게 파이팅을 보내는 제니는 ‘최재수와이프’로 통하던 주이의 과거를 모른다.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주이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약속한 3시에 촬영을 마친 하 PD는 아무래도 계획했던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으니 내일까지 사장님과 촬영을 하는 게 좋겠다고 주이를 설득했다. 어차피 주이는 촬영 기간 내내 나올 생각이었으니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오늘 같이 어색한 촬영을 내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오후 여섯 시, 제작진과 출연진이 한인 정육점 사장인 현수가 운영하는 삼겹살 가게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한국보다 맛있는 파채삼겹살을 맛본 제작진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하 PD와 최재수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제니와 주이가 앉았다. 허기진 배를 적당히 채운 최재수는 소주 한 잔을 따라 주이에게 내밀었다.
“사장님은 언제부터 시드니에서 사신 건가요?”
“저도 여기서 전집을 차린 건 이제 5개월 밖에 안 됐어요.”
“오, 생각보다 길지는 않네요. 근데, 어쩌다 시드니에 전집을 차릴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음... 말하자면 긴데, 짧게 말하면 제가 전이랑 시드니를 둘 다 좋아하거든요.”
“이야... 좋아하는 걸 둘 다 해 버린 사장님이 진짜 갑 맞네요.”
최재수는 방송 정지 이후 틈틈이 재기를 노렸다고 자신의 지난 과거를 털어놨다. 입담이 좋아 결혼식 사회나 행사 진행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왔지만,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와 비난이 두려워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긴장을 풀고 어른 대 어른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주이는 결국 감춰둔 비밀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버렸다.
“근데... 저 실은, 중 2 때부터 배우님 팬이었어요.”
“네? 진짜로요?”
옆에 앉아 그 말을 듣던 제니와 하 PD가 깜짝 놀란 눈으로 주이를 쳐다봤다. 최재수는 막 쌈을 싸려던 야채를 앞접시에 도로 내려놓고 목이 탔는지 황급히 맥주를 찾았다.
“네, 고등학교 때 브로마이드 새로 나올 때마다 모으고, 배우님 나오는 드라마 본방 사수 못 하게 하면 부모님 앞에서 울고불고... 스프링 노트에 매일 팬레터 쓰느라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좋아하는 껌이랑, 비타민C 레모나 잔뜩 붙여서 팬노트 보내드린 적 있는데 혹시 기억 안 나세요?”
“어, 레모나! 와... 그걸 어떻게 잊나요. 아니, 그게 사장님이었다고요?”
최재수는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주이를 가리켰다. 호기심이 그득한 눈으로 신기한 듯 주이를 바라보는 최재수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제니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네요. 전 그때 어떻게든 배우님 마음에 들고 싶어 그랬죠. 성공했군요. 다행이다.”
“와, 이거 갑자기 기분 엄청 묘해지는데요?”
그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웃는 제니와, 잘 됐다는 표정으로 최재수를 쳐다보는 감독, 오랜만에 팬을 만나 기분이 째진 최재수, 그리고 끝내 비밀을 감추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해 혀가 풀린 주이가 서로 건배했다.
술자리가 마무리될 무렵, 화장실에 다녀온 주이는 가게 밖 구석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혼자 서성대는 최재수와 눈이 마주쳤다. 주이는 아직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최재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한국도 아닌 시드니에서, 이런 방식으로 배우님을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저야말로요. 한국에선 안 풀리던 게 외국 나오니 풀리는 것 같아요. 한국엔 저를 나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게 트라우마였거든요. 혹시라도 사장님이 저에 대해 나쁜 생각을 갖고 계실까 봐...”
“그럴 리가요. 트라우마를 뛰어넘지 못한 거예요? 아님 뛰어넘기 싫은 거예요?”
주이의 돌발 질문에 최재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어쩌면 둘 다 인 것 같아요. 근데 오늘 사장님이 제 팬이었다는 말 들으니, 이번엔 이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겠다는 힘이 생깁니다.”
“그럼요. 그래야죠. 잘하실 거예요. 제가 내일부턴 진짜 잘해 볼게요. 응원합니다.”
“오... 진짜죠? 그럼 전, 사장님만 믿어보겠습니다. 자, 하이파이브!”
먼저 내민 그의 손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주이는 금세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마침 가게 문을 열고 나온 감독이 둘의 하이파이브 장면을 목격하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최재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감독은 끌어안은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최재수는 "형, 저 아직 안 취했어요."라며 장난스럽게 반응했다. 감독은 "너 이번엔 조심해라." 한 마디 남기고 화장실로 유유히 사라졌다. 주이는 두 사람이 형동생하며 지내는 사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란 한편, 어딘지 모르게 둘만 아는 비밀 같은 게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