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 해도 주이와 제니가 전을 팔던 시드니 전집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른 아침부터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장비를 들고 와 이곳저곳에 카메라 설치를 시작했다. 식당 안쪽으로는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됐고, 식당 안팎으로 스태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주이는 평소보다 빨리 가게에 나왔지만 감독과 스태프의 요구사항이 많아 육전 백 장을 부칠 수 있는 시간에 고작 서른 장 밖에 부치지 못했다.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주이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얼굴도 붉어져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가 미스트를 뿌려 줬지만 주이는 얼굴에 화장이 들뜬 게 여간 불편했다. 그런 주이의 표정을 눈치챈 감독이 잠깐 쉬었다 가자고 말했다.
“사장님, 잘하고 계십니다. 그냥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평소 하시던 대로 하면 돼요. 저희가 다 알아서 편집합니다.”
“하... 그래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주이는 그 순간 과거에 요가선생님이 자연스럽게 호흡하라고 지시하면 숨소리와 박자를 억지로 의식하느라 오히려 숨이 가빠졌던 것이 기억났다. 그냥 호흡에 나를 맡기면 된다고 했는데 자꾸 호흡을 의식하다 보니 호흡의 속도와 폐의 부풀기가 신경이 쓰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하니 더 부자연스러웠다.
"이제 분량이 거의 나온 것 같아요. 이거까지만 촬영하고 저희 스태프들이 전 맛 좀 봐도 될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맛있게 부쳐서 나눠드릴게요."
주이는 방송의 도입부에 내보낼 시드니 전집 소개 영상이 분량을 다 채웠다는 사실에 한시름 놓았다. 촬영을 위해서 안 뒤집어도 되는 전을 수 차례 뒤집어야 하는 어색한 설정에서 벗어나, 수고하는 스태프들이 먹을 전을 부치려니 몸이 가벼워졌다. 뻣뻣하게 서 있던 주이와는 달리 제니는 스태프가 일부러 틀어 놓은 음악의 리듬에 가볍게 몸을 맡긴 채 한 손으로 보울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란물을 풀고 있었다. 주이가 전을 부치는 데 집중할 동안, 그녀는 젊은 남자 스태프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2주 전.
“사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혹시 우리 전집에서 예능프로그램 같은 거 촬영해도 될까요?”
“예능프로그램? TV에 나오는 프로그램 말이에요?”
“네, 제가 유튜브 한다고 말씀드렸죠? 저 방송국 PD님께 촬영 제안받았어요.”
“무슨 말이에요? 예능 프로그램에 제니가 출연하게 된 거예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음... 지난번에 사장님이 저한테 하신 말씀 기억 하세요? 제가 구독자가 늘지 않는 게 고민이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그러셨잖아요. 같은 걸 계속하는데 달라지지 않는다면 방법을 좀 달리 해보라고요. 제가 시드니 전집에서 찍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리사랑 대화하는 장면이랑 제가 영어로 주문받는 모습 같은 거 편집해서 올렸거든요. 제가 시드니 전집 홍보 열심히 한 것, 사장님도 아시죠? 그런데 제 유튜브를 본 방송국 PD님이 시드니 전집에서 예능프로그램을 찍고 싶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제니는 자기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HBS PD가 단 댓글을 주이에게 보여줬다. 제니가 내민 휴대전화 속 댓글을 읽은 주이는 그동안 주이가 올렸던 영상들의 썸네일을 찬찬히 내려 보았다. 어떤 영상은 조회 수가 십만 건이 넘는 것도 있었다.
“와, 제니... 이걸 보니 진짜 유튜버가 된 것 같네요. 구독자도 많이 늘었는데요? 참, 그 예능프로그램 이름이 뭐라고 했죠?”
“<갑(甲) 자기 사장님!>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갑자기 사장님? 어머, 나 요즘 그 프로그램 진짜 재밌게 보고 있는데, 세상에, 설마 그 프로그램 PD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하영석 PD, 맞죠?”
최근 절찬리 방영 중인 예능프로그램 <갑(甲) 자기 사장님!>은 과거에 인기가 많았으나 뜻하지 않은 불운으로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은 연예인을 소환한다. 잊고 살았던 연예인을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시청자는 타임머신을 탄 듯 신기해했다. 포장 전문점 사장님이 갑(甲)이 되고, 잊힌 연예인이 을(乙)이 되어 가게 운영 비법을 전수받는다. 이때 포장 전문점 사장님과 출연자가 ‘티키타카’하는 모습을 보고 입담 좋은 패널들이 시청 소감을 나누면, 그걸 본 시청자들은 출연자의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고 프로그램 SNS에 ‘응원해요 클로버'를 눌러준다. 클로버를 많이 받은 출연자는 클로버 수에 따라 순차적으로 아침드라마, 평일드라마, 주말드라마, 인기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함으로써 재기의 기회를 획득한다. 클로버를 많이 받으면 유명 제작사로부터 절호의 캐스팅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시청자가 밀어주는 참여형 프로그램'인 셈이다.
숨은 맛집 발굴에 홍보까지 해주니, 소상공인에게 환영받는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었다. 시드니 전집을 차린 후 주이는 출연자가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우리 가게에도 한 번 와주면 좋겠다.’라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제니가 이런 제안을 받다니. 상상이 현실이 될 참이었다.
“저도 이런 연락은 처음이라 깜짝 놀랐어요.”
“혹시 신종 사기꾼 아니에요? 요즘 유학생 대상 신종 범죄가 유행이라잖아, 우리 부모님도 보이스피싱에 여러 번 노출됐었어요, 젊은 사람이 너무 잘 속는 거 아닌가?”
제니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방송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신원 확인까지 마쳤다고 했다. 오히려 전집이 방송을 타면 유명해져서 손님도 늘 테니 결국 사장님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주이를 설득했다. 주이는 그런 제니의 표정을 보더니 실낱같은 의심을 갖고 되물었다.
“그래서, 그 PD님께 뭐라고 말했어요?”
“사장님께 일단 물어보겠다고 했어요. 사장님이 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고... 그런데 PD님은 만약 촬영에 협조만 해주면 일주일 치 매출에 맞먹는 비용은 물론 출연료도 주겠다고 하셨어요. 구체적인 건 사장님 동의하신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고요.”
“흠... 일단 일주일치 수입을 책임져준다고 하니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럼 어떻게 협조하면 된대요?”
“출연자가 사장님의 역할을 할 수 있게 사장님이 직접 하나하나 알려주시고, 나머지 3일은 저랑 같이 가게를 운영하셔야 한대요. 두 달 뒤 명절 특집으로 방송이 나가야 해서 서둘러 촬영이 가능한 지 물어보셨어요. 이번에 출연하는 배우이름이 뭐라더라... 최재수라고, 예전에는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다던데, 혹시 사장님은 아세요?”
‘최재수? 최재수라... 최재수!’
제니의 말을 들은 주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재수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