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를 향한 경계를 아직 늦추지 않은 주이는 당황하는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뭐라고요? 촬영을 하겠다고요?"
“네. 제가 일하는 모습을 좀 찍어두고 싶어서요.”
“아니, 일하는 시간에 영상을 찍겠다는 건가...”
“제가 찍는 게 아니고, 그냥 휴대폰만 촬영모드로 두면 돼요. 절대, 일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일하는데 사진 찍고 영상 찍는 게 어떻게 방해가 안 되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역시나, 현수의 충고는 옳았다. 이제 겨우 일한 지 2주밖에 안 됐는데 무슨 촬영을 하겠다는 건지, 갑작스러운 제니의 요청에 주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란물을 풀고 재료를 준비했다. 둘 사이에 한참 동안 냉기가 흘렀다. 그간 봐온 모습과 달리 무뚝뚝한 제니의 표정을 주이는 견디지 못했다. 인간관계에서 늘 어색함을 못 견디고 적막을 깨는 건 주이였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이는 제니에게 이유라도 물어봤어야 하나 자그맣게 후회가 밀려와 말문을 열었다.
“근데, 꼭 일하는 시간에 영상을 찍으려는 이유가 있어요?”
주이의 질문에 제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장님, 실은요. 제가 요즘 같은 방 쓰는 언니랑 영어공부 열심히 하는 중인데요, 실제로 영어로 대화 나누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해 오면 언니가 피드백을 주겠다고 해서요. 사장님, 장사하는데 절대 방해는 안 되게 할게요. 안... 될까요?”
영어공부라... 순간 주이의 얼었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제니가 실력향상을 위해 영어로 말하는 자신을 촬영하겠다는 의도는 결국 가게를 위해서도 좋은 것 아닌가? 주이는 제니의 답변이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아르바이트생이 업무시간에 사진과 영상을 ‘대놓고’ 찍는 게 탐탁지 않다. 하지만 영어공부를 위한 촬영이라는 제니의 답변을 들은 이상 주이는 방해 안 되게 하겠다는 제니의 말을 조건부 믿어보기로 했다. 방해가 되는 순간이 오면 “거 봐요. 영상 찍느라 이런 실수가 생겼잖아요.”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조건이 있어요. 아주아주 붐비는 점심시간은 빼고예요, 그리고 만약 조금이라도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촬영 중지하라고 말할게요. 그땐 서운해하지 않기예요?”
“네! 물론이죠. 사장님, 고맙습니다!”
제니는 서둘러 가방에서 삼각대를 꺼내 매대 한쪽에 세웠다. 휴대폰을 비행기모드로 전환한 뒤 자신이 주문받는 모습이 영상에 담기도록 삼각대에 카메라를 끼우고 촬영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의 각도 상 주이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영상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담길 수 있기에 말하는 데 신경이 쓰였다. 혹시라도 무의식 중에 갑질하는 사장님처럼 담기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내뱉는 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말했다. 제니는 그런 주이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약속한 대로 손님이 많이 오기 시작하면 카메라를 껐다. 생각보다 촬영이 장사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니가 정확히 발음하려고 애쓰고, 손님들에게도 더욱 친절하게 대하는 것 같아 흡족했다. 차츰 제니의 촬영에 적응한 주이는 촬영을 핑계로 말을 가려하는 게 오히려 서로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니는 꿈이 뭐예요?”
주이는 야무지게 계란을 풀고 있는 제니를 향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유튜브 채널을 하나 운영하고 있거든요. 워홀러(워킹홀리데이를 온 사람의 줄임말) 일상을 브이로그로 기록하는 중인데요. 아직은 구독자가 50명이 채 안 돼요.”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유튜버라니, 세상이 진짜 많이 바뀌긴 했네... 전 뭐 요리사나, 개발자... 그런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요?”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었는데, 그건 부모님이 학원 선생님이어서 못 이룬 꿈, 저한테 이루라고 엄마가 세뇌시킨 꿈이고요. 워킹홀리데이 오겠다고 작정한 것도 브이로그 찍고 유튜버가 되고 싶어서였어요. 부모님께 말씀은 못 드렸지만요...”
“영상 많아요? 나도 구독해서 봐야겠다.”
“호주 일상 거의 매일 올려서 영상은 많은데, 사장님께 보여드리긴 좀 부끄러워요. 실은 그것 때문에 요즘 고민이 많아요. 매일 영상을 올리고는 있는데 구독자가 좀처럼 늘지를 않아요. 계속 이렇게 해야 하나 답답해요.”
“매일 올리고는 있는데 구독자가 안 는다... 그럼 방식을 바꿔 봐요.”
“어떻게요?”
“시드니 워홀러가 매일 올리는 일상이 재밌다면 구독자가 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뭔가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같은 걸 계속하는데 달라지지 않는다면 방법을 바꿔야죠. 아, 제니 그거 다 했으면 포장지랑 키친타월 좀 꺼내 줄래요?”
“아, 네네...”
사담이 길어지지 않도록 말을 끊었지만 주이는 제니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녀의 귓가에 오래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녀도 반복되는 일상에서 변화를 찾고자 방법을 바꿔 본 것이 시드니전집 아니던가. 시드니전집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제니에게 그럴듯한 성공신화를 들려줄 수 있겠지만 아직은 해줄 말이 없었다. 다만 주이는 변화를 준 자신의 인생이 결코 오답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키지 않은 일을 했을 때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이건 아니야.’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시드니전집을 차린 뒤로는 매일 전집에 나와 전을 부치고 낯선 세상과 마주하는 일이 주이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했다. 게다가 전집에 돕는 사람이 한 명 더해지니 전집 매출도 가파르게 상승했고, 전 부치는 일이 수월하다고 느끼게 됐다. 또 제니가 예약주문을 받기 시작하면서 전을 팔 수 있는 시간과 수요가 늘어 영업 전후에도 전을 조금 더 부칠 수 있었다. 제니에게 주는 시급 $28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느꼈고, 수고한 만큼 인센티브도 챙겨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니와 함께 일한 지 어느덧 2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전보다 더 자주 영상을 찍었지만 이제 주이는 그런 제니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은 제니의 유튜브를 보고 시드니 전집을 찾았다는 손님도 있었고, 촬영 덕분인지 그녀의 영어실력도 몰라보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제니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려는 참이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주이는 봉투에 현금을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니,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이건 인센티브예요.”
설레는 표정으로 봉투 안의 금액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 제니는 주이를 와락 껴안았다. 주이는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제니가 귀엽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제니는 갑자기 주이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장님, 저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혹시 우리 전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