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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메뉴 개발

by 새이버링

주이가 혼자서 하루에 부칠 수 있는 전의 최대 개수는 많아야 150장쯤 되었다. 만들 수 있는 전을 모두 판다 해도 원가와 임대료, 렌트비와 생활비, 교육비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적자에 가까웠다. 전집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어가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고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많았다. 생활비는 넉넉한 마이너스 통장이 후원하고 있었다. 전집을 차리기만 하면 K-열풍으로 김치전이 불티나게 팔릴 줄 알았고, 여기저기서 체인점을 내겠다고 하면 어쩌나 행복한 고민을 했던 주이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레시피를 전수받거나 대량 주문을 의뢰받아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상상은 좀처럼 현실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2개월 간 제자리걸음만 한 것은 아닌지, 주이에게 서서히 회의감이 밀려왔다.


'어느 정도 지출은 각오했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곧 시드니전집엔 위기가 찾아올 거야.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어. 일단 전집을 차리긴 했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달라져야 할 때라는 말이야. 뭔가를 또 시작해야겠어. 변화를 주고 매출을 끌어올릴 강력한 한방이 필요해.'


그날 오후, 주이는 방과 후 공원에서 놀다 온 아이들을 픽업해 마트에 들렀다.


“엄마, 오늘 저녁이 뭐야?”

“오늘 저녁? 글쎄... 너희는 뭐 먹고 싶어?”

“엄마 돈 벌기 힘드니까 싼 걸로 먹자.”

“에이, 무슨 소리. 엄마 돈 많아. 너희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라면만 빼고.”

“엄마! 그럼 내가 가격도 싸고 몸에도 좋은 거 찾아올게.”

“좋아, 우리 딸이 먹고 싶은 걸로 가져와 봐.”

“응, 엄마. 여기서 기다려줘. 오빠! 오빠도 나 따라와.”


두 아이가 장보기에 나섰다. 주이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신선한 야채와 과일, 다양한 치즈를 구경하다가 부라타 치즈가 세일 중인 것을 발견했다. 호주의 부라타 치즈는 한국의 반값이다. 소중한 재고 두 팩을 얼른 장바구니에 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잠들면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를 뿌려 와인 안주로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삼겹살이나 싸 먹을까 싶어 탄탄하고 싱싱해 보이는 상추도 듬뿍 담았다. 호주에 와서 좋은 것은 식재료가 한국보다 훨씬 싸고 싱싱하다는 점이다. 신나는 알뜰 쇼핑에 한창인 주이 뒤로 사라졌던 아이들이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뭘 고른 거야?”

“엄마, 나 육전 먹고 싶어, 엄마가 호주는 소고기랑 계란이 싸다고 했잖아? 엄마가 만들어주면 안 돼? 자 여기, 소고기랑 계란!”


아들 민준은 초코머핀과 함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계란을 들고 있었고, 딸 민서는 당당하게 포장된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우리 딸 육전이 먹고 싶었어? 좋아. 근데 이 부위론 육전은 어려울 거야. 육전용 고기가 있는지 찾아보자.”


귀여운 민서의 손을 잡고 정육코너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주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래.... 육전, 육전이 좋겠다! 잘했어, 역시 우리 딸이 최고!”

“엄마 내가 아까 말한 거잖아. 왜 갑자기 또 말해?”

“아... 엄마도 육전이 오늘 저녁 메뉴로 너무 좋은 것 같아서. 하하...”

“오빠! 봐봐. 엄마도 육전이 엄청 좋다잖아! 역시 난 창의적이야.”


민준은 잔뜩 우쭐대는 동생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고, 민서는 허락도 없이 제 몸을 만졌다며 오빠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는 사이 주이는 육전에 적합한 고기를 찾아 장바구니에 담았다. 집에 돌아가 아이들이 씻을 동안 썰기 좋게 고기를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 한 시간쯤 냉동고에 넣어두니 적당히 얼어 슬라이스 하기 좋은 형태가 되었다. 주이는 밀가루와 후추를 묻힌 뒤 계란물을 입혀 육전을 부쳤다. 집안이 고소한 육전 냄새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엄마의 정성이 듬뿍 담긴 소고기 육전을 상추에 쌈 싸서 배불리 식사를 마쳤다.

호주에서 구하기 쉽고 저렴한 것은 소고기와 계란이다. 호주 청정우가 저렴하고 맛도 좋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호주의 계란은 모두 Free Range Eggs(자연방사란)다. 우리나라에서 난각번호 1이나 2에 해당하는 귀한 계란인데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주이는 탱글탱글하고 건강한 맛을 가진 호주 계란과 비교적 저렴한 호주 청정우를 이용해 육전을 만들어 볼 생각을 어째서 이제야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음 날 주이는 한국에서 먹던 삼겹살이 그리울 때마다 들르는 한인 정육점 사장인 현수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사장님, 저 혹시 육전용 소고기도 판매하시나요?”

“육전이라... 얼마나 얇게 원하시는데요?”

“소고기는 얇을수록 맛있죠!”

“하... 뭘 좀 아시네요. 질겨서 인기 없는 홍두깨살이나 엉치살은 얼려서 얇게 잘라 육전으로 만들어먹으면 입에 살살 녹지요.”

“맞아요, 한국에서도 육전용 고기는 저렴한 편인데, 호주도 그럴까요? 육전을 한번 팔아볼까 하는데...”


현수는 냉동창고에서 묵직한 소고기 덩어리를 들고 나오더니, 가격을 맞춰보라고 했다. 주이는 당최 가늠할 수 없는 고기가 가격에 “글쎄요..”라고 손사래 쳤다. 현수는 저울에 고깃덩어리를 올리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이게 한 2kg쯤 되는데요, 50불에 드릴게요. 육전용으로 얇게 잘라서 드리면 되죠?”

“어머, 그렇게 저렴하게요?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이니까 특별 할인 해 드리는 겁니다. 언제 필요하세요?”

“일단 내일부터 한 번 시작해 보려고요.”

“네,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 9시에 가지러 오세요.”


고기를 사러 갈 때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현수에게 두어 번 해물파전과 김치전을 포장해 선물한 적이 있다. 현수는 그런 주이에게 보답의 의미로 파채를 서비스로 주거나 고기를 넉넉히 얹어 주었다. 몇 번의 주고받음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반가운 존재가 됐고 현수는 어느새 주이의 사업에 조력자가 될 참이었다.


다음 날 주이는 평소보다 일찍 소고기에 묻힐 밀가루를 챙겨 정육점으로 향했다. 현수는 주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준비한 소고기를 커다란 포장용기에 담아 내밀었다. 슬라이스 된 소고기는 어제 본 고깃덩어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피가 늘어나 있었다.


“아니, 세상에... 고기 한 겹 한 겹에 이렇게 구멍을 송송송 뚫어주시다니요!”

“이렇게 해야 고기가 부드럽고 계란물도 잘 입혀요.”

“구멍 뚫기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저는 생각지도 못한 걸 해주시다니, 눈물 날 것 같아요.”

“아이고, 무슨 고기구멍 좀 뚫어준 걸 가지고 그렇게 감동을...”


주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육전이 더 맛있도록 배려한 현수의 마음은 자신이 육전을 위해 준비한 것을 넘어선 노력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흘렀지만 수입은 턱없이 적었고,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부담과 소비자 반응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메뉴 개발을 마음먹었다. 오늘부터 육전을 팔아볼 생각에 어젯밤에는 잠도 잘 안 왔는데, ‘잘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라고 생각했다가 또 그런 미래는 상상조차도 하기 싫었다. 얇디얇았던 주이의 마음에 현수의 정성이 얹어져 불안함은 확신으로 곧장 바뀌었다. 정육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을 거친 소고기로 만든 전이 맛없을 리 없었다. 현수는 감동한 주이를 보며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제가 고기 구멍을 뚫다가 생각난 건데요, 고춧가루랑 간장에 설탕, 참기름 넣고 파절이 무쳐서 육전으로 쌈 싸 먹으면 기가 막히거든요, 저야 기계가 있지만 직접 파채 만드시려면 그것도 보통일이 아닐 거예요. 생각 있으시면 제가 파채도 저렴하게 판매할 테니, 필요하면 말씀만 하세요.”

“네. 그럼요. 제가 오늘부터 반응 살피고 말씀드릴게요. 성공하면 다 사장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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