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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카페 사장 PAUL

by 새이버링

“사장님, 한국 분 맞죠?”

“아... 네.”


주이가 폴의 카페를 처음 찾았던 날, 커피와 바나나브레드는 영어로 주문해 놓고 한국말로 질문하는 주이를 보며 폴은 수줍게 웃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그의 흰 셔츠에 ‘PAUL’이라고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정돈하지 않은 짙은 턱수염이 거칠다기 보다 선한 인상을 풍겼다. 주이는 타국에서 사업하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


“커피가 진짜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바나나브레드도요. 완전 제 취향.”


주이는 한 개 밖에 없는 보조개가 깊이 파이도록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버터 잔뜩 발라 구워주세요.”

“네, 잔뜩...”


폴은 이미 버터가 잔뜩 들어간 바나나브레드에 버터를 잔뜩 발라 구워 달라는 이 한국 여자의 유머를 적당히 웃어넘겼다. 시드니에 온 뒤 주이는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가볍게 공원 주위를 뛴 후 구글맵을 뒤져 평점 4.0 이상의 카페를 탐색하는 루틴이 생겼는데 인심 좋아 보이는 사장과 좁지만 아늑한 카페의 분위기, 진한 플랫화이트에 곁들여 먹는 바나나브레드의 맛에 홀딱 반해 L카페의 단골이 됐다. 시드니에는 구글 평점 4.0 이상의 카페들이 번호표를 뽑고 대기 중이었지만, 새로운 곳이 영 내키지 않을 땐 L카페가 안전했다. 매주 두 번은 방문하는 그녀가 카페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면 폴은 주이의 영어 이름을 따 “Stella Set?”라고 묻고는 벽에서 뗀 명함크기의 스탬프 쿠폰에 도장 세 번을 꽝꽝꽝 찍어 벽에 다시 붙였다. 버터 듬뿍 바른 바나나브레드와 오트밀크로 만든 플랫화이트, 주이의 단골 메뉴였다.

잔뜩 흐린 금요일 아침이었다. 주이는 Stella Set를 주문한 뒤 크림색 둥근 바테이블 옆 스탠딩체어에 걸터앉았다. 의자와 테이블의 높이가 가슴께로 높아서 창밖으로 지나가는 행인과 눈이 마주쳐 찡긋 눈인사를 보냈다.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CommonWealth bank 앞으로 형광색 조끼를 입은 장정 서넛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주이는 저도 모르게 그중 한 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십 대 초반쯤일까, 서양 남자들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흰색 안전모를 썼고 형광색 조끼를 걸쳤다. 조각같이 앳된 얼굴은 흡사 티모시 살로메를 연상시켰다. 조금 잘생긴 외국인들은 다 배우 같다는 말을 하면 남편은 주이가 늘 사대주의에 젖어 있다고 비난하곤 했다. 그러면 주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코쟁이들은 언제나 한국 아저씨들보다는 잘 생겼지.'하고 받아쳤다. 퇴근 후 조끼와 안전모를 벗어던지고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떠나는 섹시한 청년의 모습을 상상하는 주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버터 잔뜩 발랐어요. 페페사야라고 호주에서만 나는 발효 버터예요.”

“오, 버터 바꾸신 거예요?”

“아뇨, 저도 선물 받았는데 맛보시라고 가져와 봤어요.”


폴은 크림색 테이블 위에 커피와 바나나브레드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버터를 정중하게 가리켰다. 잘생긴 외국인을 뚫어져라 쳐다본 것을 들켰을까 봐 폴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따라 턱수염이 더 거칠고 길어 보이는 폴의 표정이 어두웠다. 주이는 버터맛 품평을 기다리는 폴을 의식하며 바나나브레드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이 버터 캐러멜 향이 나는 것 같아요. 맛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다행이네요. 저... 근데 오늘 밖이 좀 시끄럽죠? 여기 사람들, 한국 같으면 한두 시간이면 끝낼 것을 이틀을 모여서 저러고 있네요. 자세히 보면 실제 일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에요. 나머지는 차량통제, 거리통제...”

“전 괜찮아요. 이런 소음마저도 좋아요. (젊은 남자도요.)”


환하게 웃는 주이의 표정에 폴의 경직된 표정이 누그러졌다. 주이는 그제야 평소 바깥에 놓아둔 스텐딩테이블도 전부 안으로 들여놓은 것을 보고 영업방해로 불쾌해진 폴의 기분을 읽었다.


“별로 큰 공사 같지도 않은데, 여럿이 달라붙어 참 요란하게 하네요.”


폴은 투덜거리다 방금 들어온 손님을 응대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주이는 창 밖을 다시 살폈다. 잘생긴 청년을 살피느라 시끄러운 줄도 몰랐다. 일하는 사람은 한 명인데, 잘생긴 청년을 포함한 두 사람은 둘레에 표지판을 여러 개 세워두고 지나가는 행인과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안전을 중시하는 호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하던데 평소와 다르게 툴툴 거리는 폴이 거슬렸다. 분명 지난주에 기쁜 소식을 전하며 주이에게 자랑을 늘어놓던 그였는데 오늘은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아까 온 손님이 커피를 포장해 매장을 떠나자 주이는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에 있는 폴을 향해 안부를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건 주이의 주특기인데, 특히 폴처럼 무섭게 생겼으면서 내면은 우유 같은 사람의 허를 찌르곤 했다. 폴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님 응대를 직원에게 맡기고 주이에게 다가왔다.


“일이 좀 있었어요. 지난주에 제가 서큘러키 근처에 2호점 내는 거 말씀드렸죠?”

“네. 준비는 잘 돼가요? 저도 시드니전집 2호점 내고 싶은데... 하하, 노하우 좀..”

“불발됐어요.”

“갑자기 왜요?”

“원래 이곳 본점은 테이크어웨이(take away) 전문점으로 살리고, 2호점은 L카페 굿즈랑 원두도 판매하면서 플래그십 스토어로 운영할 계획이었거든요.”

“멋진 계획인데요?”

“다 알아보고, 굿즈 제작 업체랑 인테리어까지 완벽하게 계획 짜놨거든요. 시작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투자하기로 한 형이 어제 갑자기 계획을 틀었어요.”

“네? 갑자기요?”

“형이 여기저기 투자하는 곳이 많은데, 자금 조달이 잘 안 된 모양이에요. 그런데 제 느낌에는 L카페 콘텐츠 하나만 보고 투자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요즘 그것 때문에 며칠 째 잠도 잘 못 자요.”

"무리.. 라니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우연히 다른 사람이랑 통화하는 걸 엿들었거든요. 아... 엿듣는 건 취미가 아닌데, 우연히요."


폴은 행여 주이가 자신을 오해할까 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주이는 풀이 죽은 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L카페가 작년 바리스타 대회에서도 1등 했잖아요. 제가 시드니에서 제일 좋아하는 커피인걸요?”

“휴... 죄송해요, 제가 고객님께 괜한 말을 했네요.”

“아뇨. 정말 속상하셨겠어요...”


폴은 지금 막 들어온 단골손님을 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인사하고 주문을 받으러 떠났다. 그가 처음 서큘러키 근처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할 거라 말했을 때, 주이도 같은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그의 성장 서사에 시드니전집의 미래를 포개어 봤다. 폴은 자기 손으로 직접 볶은 원두를 호주 전역뿐 아니라 해외로 배송할 유통 체인을 구상하고, 대학시절 그의 전공을 살려 머그나 에코백, 엽서, 볼펜 등 본격적인 굿즈개발을 하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지금도 L카페 입구에 진열된 볼펜과 머그는 시그니처 상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포장 컵에 새겨진 스탬프 디자인, 냅킨에 찍힌 프린팅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재능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수성가하는 모습을 시드니전집에 투영하려던 참이었다. 주이는 커피잔을 비우고 남은 바나나브레드 포장을 요청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쟁반을 받고는 말없이 바나나브레드를 포장하는 폴에게 주이가 말했다.


“사장님 있잖아요, 사장님 같은 분은 결국 잘 될 거라 믿어요. 일단 커피가 너무 맛있잖아요? 또 좋은 기회가 올 거예요. 갑자기 모든 게 술술 풀리는 L카페 성공스토리는 매력 없어요.”


폴은 생각지도 못한 주이의 응원에 수줍게 웃고는 마지못해 동의한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L카페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가 내린 커피맛이 이토록 근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주이는 폴에게 한 말을 스스로에게도 하면서 마음을 북돋았다.

‘최주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다.’

미소를 짓는 폴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카페 문을 열었다. 아까 본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치켜 떠 주이를 쳐다보고 웃었는데 아까보다 훨씬 잘생긴 얼굴에 주이는 주책맞게 활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횡재가!’


발그레진 볼을 쓰다 듬다가 어쩐지 오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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