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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는 무서워

by 새이버링

주이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시드니전집 문을 열었다. 어제는 생각보다 손님이 없어서 오늘치 장사 준비를 해놓고 간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매대 문을 열었다. 팬을 달구고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팬이 달궈지는 동안 눈을 3초쯤 감고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어제보다 손님이 많기를.'


30분쯤 뒤, 첫 손님이 찾아왔다. 풍성한 긴 머리에 짙은 화장, 크롭티셔츠를 입은, 허리 라인이 매끈한 한국인 여자 두 명이 매대 앞으로 다가왔다. 주이는 주문받을 태세를 갖췄지만 손님들은 아직 아닌 듯했다. 먼저 시드니전집 배너를 배경으로 사진을 서너 장 찍고, 배너 왼쪽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V를 한 뒤 한 번 더 찍고, 배너 오른쪽에 서서 손 위에 넓적한 접시를 받치듯 손을 펼쳐 사진을 찍었다.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한참 동안 확인하더니 매대로 다가와 해물파전과 김치전을 하나씩 주문했다. 주이가 전을 부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는 걸 보고 주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 부친 전을 손에 쥐고도 바로 먹지 않고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막 나왔을 때 먹어야 맛있는데, 사진은 그만 찍고 좀 먹지는...’


전은 부치고 난 뒤 김을 식혀 손님에게 내미는데 이때 먹어야 가장 맛있다. 주이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바삭해서 빳빳했던 전조각이 식으며 축 늘어지는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손발이 척척 맞게 서로를 찍어주는 박자에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주이는 실눈을 떴다. 이쯤 되니 감이 왔다. '조금 낯이 익기도 한데...' 이들은 보통 손님이 아니었다. 인플루언서다! 실로 요즘의 세상에서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하다. 유명 배우가 산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연예인이 다녀간 집은 핫플이 된다. 파리 날리는 시드니전집 홍보를 위해서라도 주이는 뭔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맛이 어때요?”


주이는 평소의 친절에 한 술 더 얹어 물었다.


“이거 파전 진짜 맛있어요! 엄마가 해준 맛이 나요, 여기 시드니 찐맛집인데요?”

“어머, 정말요? 맛있다고 해주시니 제가 더 기쁘네요. 목도 마르시죠? 서비스로 음료수 한 잔씩 드리고 싶은데, 냉장고 안에서 드시고 싶은 것 골라 보세요."

“와 진짜요?? 사장님 센스, 짱이네요!”


병음료값이 결코 싸지 않은 시드니에서 전 값에 육박하는 핑크분다버그와 포카리스웨트를 하나씩 공짜로 획득한 그녀들은 기뻐하며 서로 깔깔깔 웃고는 음료를 들고 있는 사진까지 찍었다. 그 모습을 보는 주이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전 값을 안 받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사업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남겨 놓는 게 바람직한 사장의 태도라고 생각해 제값을 받았다. '서비스로 전을 하나씩 더 맛보라고 줄까?' 생각하다가 다음 일정이 바쁜지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그들을 붙잡지 못해 기회를 놓쳐 버렸다.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주겠지?' 생각하며 그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서비스 음료는 전집 홍보 좀 잘해달라는 무언의 부탁임을 그들이 눈치채기를 빌었다. 주이는 인스타그램에서 '후르릅자매'를 검색했다. 최근에 올라온 피드는 여수 맛집 방문 후기가 있었다. 혹시 몰라 스토리를 눌러봤는데 역시나, 오늘 새벽 호주 공항에 잘 도착했다는 안부와 함께 올린 호텔 로비의 사진이었다. '그럼 호주에 오자 마자 시드니전집에 온 거야? 우와...' 주이는 저도 모르게 치아가 훤히 드러나 보이도록 미소를 지었다. 그날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손님이 드문 드문 방문 해주었지만 주이는 어쩐지 하루 이틀 지나서 손님이 줄 설 것 같은 기대감에 차 있었다. 이후로 저녁마다 '후르릅자매'의 피드를 확인하며 시드니전집 후기가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며칠 후.

젊은 한국인 남자 네 명이 시드니전집을 찾아 해물파전 두 개와 김치전 두 개를 주문했다. 네 명 모두 자기가 주문한 전은 각자 결제했다. 네 번의 카드결제를 모두 마친 주이는 그제야 전을 데우기 시작했다. 남자 넷은 아무 말 없이 주이 앞에 서서 눈치를 교환했다. 가장 왼쪽에 선 남자가 주이가 전 부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는 작은 소리로 ‘야, 네가 해.’하며 팔뚝으로 옆의 남자를 슬며시 밀었다. 주이는 '젊은 청년들이 전 하나로 될까?'잠시 생각하다가 '맛있으면 하나씩 더 주문하겠지?' 생각하며 따끈따끈한 전을 유산지에 감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밀었다. 다들 한 입씩 베어 물더니 지나치다 싶은 표정으로 맛있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중 눈에 장난기가 그득해 보이는 남자가 주이를 향해 호기롭게 물었다.


“사장님? 전이 진짜 맛있는데, 저희 음료수 하나씩 서비스로 주시면 안 되나요?”

“네?”


주이는 대구사투리가 구수한 남자의 부탁에 황당했다. 배너에 $4이나 하는 음료수 가격이 떡하니 보일 텐데 전 값의 절반이나 하는 음료수를 서비스로 달라니, 하지만 동시에 이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돌연 직감했다. 며칠 전 인플루언서로 보이는 여자 두 명에게 음료를 서비스로 준 일이 번쩍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을 하나씩 사 먹은 네 명에게 병음료를 하나씩 줬다간 밑지는 장사가 될 게 뻔했다. 난처한 그 순간, 주이는 기지를 발휘해 1.5L 콜라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며칠 전 울월스에서 코카콜라 $1 행사를 하길래 전이 느끼하면 마시려고 사 둔 것이었다. 주이는 아이들이 썼던 플라스틱 컵을 꺼내 선심 쓰듯 콜라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남자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꺼이 콜라를 받아 마셨다. 주이가 키친타월을 꺼내려 몸을 숙인 사이 남자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라도 어디냐.’


주이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남자들이 떠난 뒤 콜라를 따랐던 플라스틱 컵들을 치우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후르릅자매'의 피드를 찾아봤다. 어젯밤 늦게 시드니전집 게시물을 올린 것을 보고 주이의 심장이 쿵쾅댔다. 벌써 댓글이 130개쯤 달렸다. 그때 왔던 여자들이다! 시드니 전집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사진과 채반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전을 찍은 사진이었다.


‘와... 사진을 진짜 잘 찍네... 역시 인플루언서들은 달라.’


팔로워수가 22만 명이나 되는 계정에 시드니전집을 홍보한 게시글이 올라온 건 분명 행운이다. 주이는 댓글을 달고 이 게시물을 퍼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열 장도 넘는 사진을 넘겨 보다 마음이 바뀌었다. 당장 광고모델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청량한 포즈로 전을 입에 넣는 후르릅 자매, 여자의 뒤로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의 사람... 바로 주이였다. 카메라 왜곡이 심해 입은 튀어나왔고 머리는 짱구가 됐다. '후르릅자매'의 팔로워 중 누구도 흐릿한 괴물이 된 주이에게 관심이 없겠지만 유일한 한 사람, 주이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에이, 자기만 잘 나온 사진을 올렸네, 쯧쯧...’


10번째 사진은 그녀가 서비스로 챙겨 준 핑크분다버그와 포카리스웨트를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전이 맛있다니 주신 서. 비. 스'라고 쓰여 있었다. 왜 인스타그램 사진에서는 큰 글씨보다 작은 글씨가 더 눈에 잘 띄는가. '후르릅자매'는 마치 비밀인 것처럼 작게 글씨를 썼지만 그럴수록 더 확대해서 읽게 되는 심리가 야속했다.


“여러분 저 드디어 시드니에 도착했어요. 벌써부터 한국음식이 너무 그리운데 어쩌죠? 그래서 오늘 제일 먼저 해물 파전을 먹었답니다. 시드니에 전집이 있다는 거 놀랍지 않나요? 여기 해물파전 진짜 맛있어요. 꼭 가세요! 두 번 가세요! 친절한 사장님 서비스 감사합니다!#시드니전집#시드니맛집#시드니여행꿀팁#후르릅”


댓글_‘후르릅 너무 맛있어 보여요!’

댓글_‘저는 서비스, 포카리스웨트로 먹겠어요.’

댓글_‘와 시드니 가성비 맛집이네요. 저 내일 시드니 가는데 꼭 가볼게요!’

.....


100개가 넘는 댓글에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도 '후르릅자매'의 팔로워 중에서 시드니에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막연히 상상해 봤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네. 손님이 아무리 많이 와도 음료수를 서비스로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텐데... 괜한 짓을 했나?’


주이는 뒤늦게 ‘음료수 준 건 비밀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센스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후르릅자매'의 팔로워들이 시드니전집에 와서 서비스를 주는지 안 주는지 눈치를 살피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한국인 손님이 전 맛을 극찬하면 서비스 음료에 대한 부담을 먼저 떠올릴 미래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이는 내일 오전에는 마트를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이컵과 2L 콜라를 사기 위해.

(호주 마트는 아이러니하게도 2L 콜라보다 600ml 콜라가 더 비싸다.)


인플루언서는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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