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예요?

by 새이버링

시드니 전집 폐점 10분을 남겨놓고 면접을 보러 온 제니는 잠시 기다리라는 주이의 말에 가게 안 벽 쪽에 자리한 의자에 점잖게 앉아 있다가 주이가 남은 전을 포장하고 매대를 정리할 때, 소리 없이 일어나 기름 젖은 키친타월과 계란껍데기 치우는 일을 거들었다. 주이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 제니는 물티슈로 팬 주위 튄 기름을 닦고 있었다. 기름 닦은 물티슈는 그냥 버리지 않고, 바닥에 조금씩 널려있는 부스러기까지 야무지게 훔친 뒤 버렸다. 이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주이는 제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예요? 간단히 영어로 자기소개, 해볼 수 있어요?”


제니는 스물세 살이고 워킹홀리데이로 시드니에 왔다며 자신을 더듬더듬 소개했다. 주이는 얼굴이 붉어진 제니가 떨고 있음을 느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기억해 냈다. 외국인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보다 같은 한국인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 단수 주어에 따라오는 동사 뒤에 's'는 붙였는지, 이 단어에 정관사 'The'를 붙이는 게 맞는지, 적절한 단어 선택과 정확한 발음도 버거운데, 한국 사람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종류의 면접. 주이는 매서운 사장의 시선이 아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니가 더듬더듬 영어로 자기소개를 이어 나가자 17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스물셋의 주이가 난생처음 호주에 왔을 때, 시티에서 지하철 50분 거리의 고든카페에서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에서도 해본 적 없는 아르바이트를 타국의 카페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에 몹시 우쭐했다. 대학에서 같은 과 친구들 중에는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주이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부끄러울까 봐 시도조차 할 용기를 못 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회화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것이기에 일부러 한국 사람이 적은, 시티에서 먼 동네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한인 커뮤니티 <호주세상>에 카페 구인광고가 올라와서 면접을 보러 Gordon이라는 낯선 동네로 향했다. 고든카페의 여사장 수진은 테이블에 앉은 주이 앞에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예요? 여기는 현지인 손님이 대부분이라 영어를 못하면 곤란해요.”


주이는 시티의 어학원에서 자신이 Upper Intermediate 레벨이라고 소개했다. 총 6단계의 레벨 중 Advanced 다음으로 높은 레벨이라고 설명했다. 수진에게 어학원 레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영어로 자기소개를 시켰다.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마친 주이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일하면서 더 배우면 되지. 근데, 시티에서 여기까지 매일 오려면 일찍 일어나야 할 텐데 할 수 있겠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 의사를 밝혔다. 수진은 커피머신 앞에서 쭈뼛하게 서 있던 남편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그 자리에서 주이의 채용을 결정했다.

주이는 고든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플랫화이트와 고메 샌드위치를 매일 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렸고, 각종 토스트를 비롯한 브런치 레시피를 전수받았다. 손님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하고, 음식을 서빙하며 현지 손님들과 나눴던 스몰토크는 주이의 영어실력을 일취월장하게 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 낯선 동네에 장 보러 가는 길 구경했던 아기자기한 서점과 도서관은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아이리버 이어폰만 있으면 지루하지 않았던 출퇴근 길 지하철 풍경들, 타국에서 부모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사장님 부부를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다. 하루는 근무시간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주이에게 수진은 김치전을 만들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수진이 만든 반죽을 빠른 손놀림으로 팬에 부치는 주이에게 수진은 시드니에 전집을 차려도 될 만한 솜씨라고 칭찬을 퍼부었다. 이후로도 브렉퍼스트 메뉴 주문이 들어오면 해시포테이토와 계란프라이, 팬케이크 등 팬에 익히는 조리는 주이 담당이 됐다. 그때부터 주이는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주이는 어릴 적 꿈과 카페의 추억들이 그리워 다시 호주에 갔을 때 고든 카페를 찾아갔지만 카페가 있던 자리에는 일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일식당에 들어가 점심 메뉴를 주문하고 자신이 샌드위치를 싸고 주문을 받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운 마음이 밀려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디에 계실까? 건강하실까? 호주에 계시겠지? 혹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직도 스물셋의 나를 기억해 주실까?’


제니는 워킹홀리데이로 시드니에 온 지 3개월이 됐고, 어학원 과정이 끝나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라 했다. 공교롭게도 주이가 처음 호주에 왔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그런 공통점 때문이었는지, 주이는 처음으로 면접을 보러 온 제니에게 익숙한 친밀감을 느꼈다. 어리숙했던 그 시절 주이와는 달리 건강하고 탄탄한 몸매에 개성 있는 옷차림, 시원시원한 눈코입을 가진 제니에게 주이는 금세 호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영어실력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 보여서 합격. 일이야 하면서 배우면 될 테고, 중요한 건 일머리와 손재주가 있느냐였다. 주이의 빠른 손놀림에 박자를 맞추려면 손이 빠르고 행동이 굼뜨지 않아야 했다.


“손은 좀 빠른 편인가요?”

“네, 저 진짜 손 빨라요! 저희 집이 종갓집이라 일 년에 제사를 10번도 더 지내거든요.”

“정말요? 아니, 일 년에 제사를 10번도 더 지내는 집이 아직도 있단 말이에요? 어휴, 나라면 전 냄새도 맡기 싫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 면접을 보러 올 생각을 한 거죠?”

“맞아요. 솔직히 초등학생 때부터 전 부치는 데에는 이골이 났어요,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왔을 때 제사 안 지내도 된다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구인광고에서 시드니전집을 본 순간, 아... 이건 운명인가 싶더라고요...”


제니의 말을 들은 주이의 눈이 호기심에 반짝거렸다.


“왜요?”

“저는 여기 차이나타운 뒤 Regis타워에서 룸셰어를 하고 있어요. 시드니 전집이 숙소랑 위치도 가깝고 딱 제가 원하는 시간대에 구인광고가 났더라고요. 구인광고에는 제가 전을 부치지 않아도 된다고 쓰여 있어서요. 그래서 면접을 보러 온 거예요”


말 센스도 좋고 성실해 보이는 제니는 면접을 보러 온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됐다. 주이는 더 괜찮은 사람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다간 제니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물티슈를 한 번만 쓰고 버리는 걸 아까워하던 주이는 제니가 물티슈로 기름을 닦고 바닥까지 훔치는 모습에 채용을 결심했다. 나중에 주이가 제니에게 "물티슈 재활용하는 거 보고 반해서 채용한 거 알아요?"라고 말했을 때 제니는 한 번 쓴 물티슈로 신발도 닦고, 창틀도 닦고, 묵은 먼지를 닦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열과 성을 다해 이야기했다. 제니는 가장 바쁜 시간인 11시부터 2시까지만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했다.


제니가 일을 거들기 시작하면서 주이의 장사는 한결 수월해졌다. 제니의 말대로 종갓집에서 자란 티가 제법 났다. 주이가 전을 부치는 동안 허드렛일은 제니가 빠른 속도로 해치웠기에 장사가 끝난 뒤에도 덜 피곤했다. 제니는 시킨 일 외에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역할을 했다. 전을 부칠 때마다 자꾸 말을 걸어 주이의 손을 데게 했던 리사나 다른 손님들의 질문을 소화해 준 것이다. 심지어 손님과의 대화가 길어지면 제니는 뒤에서 손님이 기다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주이는 제니의 옆구리를 살며시 찔러야 했다. 다행히 호주에서는 그런 제니를 보고 불평하는 손님은 없었다. 주이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면 그럴 필요 없다는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제니는 헨리를 비롯한 단골 예약도 SNS 메시지를 통해 받았다. 미리 주문한 손님은 기다릴 필요 없이 약속한 시간에 전을 받아갈 수 있었다. 서서 먹는 손님들에게 물티슈를 챙겨 주고, 손코팅지를 구해 와 튼튼한 번호표를 제작했다. 주이가 전을 부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대기 손님들을 안내했다.


“사장님! 제가 어제 차이나타운에서 이걸 구했어요!”


막 출근한 제니는 가방에서 실리콘 스패너를 꺼냈다. 스패너는 팬 구석구석에서 바깥으로 계란 부스러기를 야무지게 밀어냈다.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주말에 마켓에 갔다가 빠에야 만드는 아저씨가 이걸 쓰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주말에 마켓 구경까지 가서 일 생각 한 거예요?”

“키친타월로 계란 부스러기 닦으니까 아까운 기름까지 닦이고, 쓰레기도 많이 생기는 것 같아서 싫었거든요.”


주이는 이렇듯 진심으로 시드니전집의 일을 거드는 제니가 고맙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됐다. 정육점 사장 현수가 처음부터 요즘 MZ 아르바이트생한테 너무 잘해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다. 예쁘다고 잘해주면 할 말 다 하고 챙길 것 다 챙기면서 사장을 어려워하지 않게 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일 테니 주이는 제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일관성 있게 열심히 하는지는 최소 3개월 동안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제니가 일한 지 2주쯤 지났을 때, 평소보다 일찍 전집에 도착한 제니는 전을 열심히 부치는 주이의 눈치를 힐긋 살피더니 휴대전화를 두 손에 고이 들고 주이쪽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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