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전집에 들른 단골 리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이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뭔가 굉장히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주이에게 속삭였지만 전처럼 수다스럽게 말을 걸진 않았다. 시드니전집을 오고 가는 손님들을 배려해 스태프들이 미리 촬영에 대한 사전양해를 구하는 메시지를 적어 매대 앞에 붙여 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서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이 촬영 중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주고받은 대화들은 적당한 편집과 각색을 거쳐 TV로 방영될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주이는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어젯밤 술에 취해 최재수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걸 무척 후회했다. 가게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제 최재수 얼굴을 어떻게 보나 한숨을 연거푸 내뱉었다. 그러나 젖은 머리를 말리며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말하고 나니 한결 낫다. 모른 척하면서 촬영하는 게 더 어색하고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을 거야. 방청객들에게는 내가 재수오빠 팬이었다는 걸 드러내는 게 플러스가 될 수도 있어.'
주이는 걱정이 될 때마다 불평하기보다는 걱정되는 일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떠올리려 애썼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니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주로 샤워를 하거나 산책을 할 때 걱정을 안도로 바꾸는 결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또한 최재수의 팬으로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진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촬영에 임하겠노라 다짐했다. 그 결과 둘째 날 최재수와 주이는 확실히 어제보다 죽이 더 잘 맞았다. 주이는 손이 느린 최재수의 속도를 발견하고는 '네 번째 김치전 반죽을 부었을 때, 처음 부었던 반죽을 뒤집으면 되겠네요.'라고 ‘뒤집는 타이밍’을 정해줬다. (주이는 손이 빨라 여덟 번째 반죽을 붓고 첫 번째 반죽을 뒤집는다.) 거의 익은 김치전은 가장자리를 뒤지개로 꾹꾹 눌러줘야 바삭해진다는 주이의 설명에 최재수는 어디 한 번 비교해 보자며 뒤지개로 누른 것과 안 누른 것을 각각 시식했다. 비교 결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는 뒤지개로 누른 것이 훨씬 바삭하다며 놀라워했고, 주이는 사장이 전을 다 먹어버리면 팔 게 없겠다고 농담섞인 면박을 줬다. 그런 주이를 따스하게 쳐다보는 최재수의 눈빛이 전보다 훨씬 빛났다.
한국음식을 매우 좋아한다고 밝힌 외국인 손님이 다른 곳에서 먹어 본 김치전과 맛이 다르다며 속재료를 물었는데 최재수는 비법은 TUNA(참치)에 있다며 주이가 애써 비밀로 지켰던 레시피를 발설하고 말았다. 심지어 마치 그 레시피를 자기가 개발한 것처럼 말하며 참치가 들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손님의 반응에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甲) 자기 사장님!>을 즐겨본다는 한국인 손님에게는 클로버를 눌러줄 것을 약속받았다. 어릴 적 팬이었다는 주이 또래의 엄마들이 단체관광을 와서는 앞다투어 최재수에게 싸인을 요청했다. 하 PD는 최재수가 팬들의 관심에 취해 사인하느라 전을 뒤집지 못할 때, 옆에서 서둘러 전을 뒤집으려는 주이와 눈이 마주쳤다. 하 PD가 주이에게 신호를 보내며 슬며시 고개를 저었고 주이는 전이 타는 것을 애써 모른 체 했다. 이윽고 김치전이 새카맣게 탄 것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린 최재수는 제 머리를 때리며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주이에게 다정한 양해를 구했다. 꼭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이 서로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모습 같았다.
이틀간 주이와 최재수의 촬영이 끝나자, 3일 차부터는 제니가 최재수를 보조하며 사흘간 장사를 이어 나갔다. 제니는 주이와 일할 때보다 훨씬 더 싹싹하게 최재수를 보조했다. 종갓집에서 전을 부치는 데 이골이 났던 제니가 시드니에 온 지 3개월 만에 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이야기는 최재수를 놀라게 했다. 아르바이트할 때는 한 번도 전을 부치지 않았던 제니는 최재수가 서투를 손짓으로 육전을 부칠 때 옆에서 거들기까지 했다. 주이도 제니가 실제로 전부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역시나 종갓집에서 전부친 경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주이가 출근을 못하는 날 제니에게 전부치는 걸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주이는 카메라 밖에서 둘의 장사를 지켜보며, 재료의 위치를 알려준다거나 갑자기 찾아온 손님의 질문에 답하는 등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도움을 줬다. 카메라 한 대가 최재수를 지켜보는 주이의 모습을 꾸준히 촬영했다. 몸짓, 웃음, 표정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5일 차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밤, 주이는 아이들을 재우고 발코니로 나왔다. 늦은 시간 마시는 맥주 한 캔은 밤의 무드를 장악함은 물론 숙면을 도왔다. 지난 4일간의 촬영을 회상했다. 시드니전집을 차린 것도 신기한 일인데 시드니전집을 무대로 촬영할 기회를 얻다니, 생각할수록 믿기 어려운 이벤트였다. 방송이 나가면 주이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시드니전집이 유명해질까?...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신차리라는 듯 진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주이는 우주까지 펼쳐 둔 상상을 서둘러 접고 진혁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은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고, 진혁은 야근 후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촬영은 잘했어?”
“응, 이제 하루 남았어, 좀 시원섭섭하네?”
“최재수는? 그 사람 어때?”
“뭐가 어떠냐는 거야? 흠... 배우는 배우더라. 매너 있는 서울 남자야. 나한테 잘해주고 친절해. 연예인이지만 소탈하고 인간적이야. 촬영 때문에 장사가 안 되긴 해도 그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어.”
“잘 되겠지. TV에 나올 거니까. 그 사람이 잘 되든 말든 자기가 무슨 상관인데? 칭찬을 아주 남발하네? 촬영 중이니까 당연히 친절하겠지.”
주이가 한때 ‘최재수와이프’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남편은 최재수가 주이네 가게에서 촬영하는 상황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 사실을 방송이 나가기 전에는 밝혀야 할텐데, 오늘은 확실히 아니었다.
“설마, 나랑 최재수를 질투하는 거야? 하하하...”
“질투는 무슨, 내가 좀 알아봤는데 그놈, 여자문제가 아주 복잡하대.”
“최재수가 뭘 잘못했길래 그놈이래? 자기보다 두 살은 많은 형이거든? 그리고 여자문제를 어떻게 알아?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런 게 검색하면 나와?”
“응, 다 아는 수가 있어. 나 대학 동아리후배 녀석이 그쪽 업계에 있는데 말해주더라고. 아무튼 넌 조심해. 잘해준다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고.”
“아휴, 조심할 게 뭐 있겠어? 설마 그 사람이 나한테 작업이라도 걸까 봐?”
“네가 호감을 보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봐, 나는.”
“와이프를 못 믿네, 쯧쯧...”
“널 믿지, 그놈을 못 믿는 거고. 기러기 아빠인 내 신세가 처량하지.”
“혼자 있을 때나 잘 즐기세요. 나중엔 혼자인 시간을 엄청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내가 집 근처에 cctv 다 설치해 놨으니까 바람피울 생각 근처에는 얼씬도 말고. 내 걱정은 붙들어 매.”
주이는 남편의 귀여운 걱정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두 사람이 썸이라도 탈까 봐 걱정을 했다니, 암만 생각해도 영화 같은 시나리오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배우와 어른이 돼서 만나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클리셰. 주이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최재수와 썸 타는 시나리오를 상상하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