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by 새이버링

마지막 촬영날이 밝았다. 최재수는 처음 전집에 온 날보다 한결 숙련된 손놀림으로 전을 부쳤다. 이제 여섯 번째 반죽을 부었을 때 첫 번째 반죽을 뒤집을 수 있었다. 팬이 잘보이도록 설치된 카메라는 그의 손놀림을 클로즈업하여 담고 있었다. 지글지글 전 익는 소리까지 녹음하는 듯했다. 최재수가 하는 일을 옆에서 척척 거드는 제니의 표정도 밝고 신나 보였다. 그녀는 하 PD가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은 Charlie Puth의 <I don't think that I like her> 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주이와 함께 일할 때에는 볼 수 없던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제니는 최재수를 사장님이라 부르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고 가벼운 농담도 곧잘 주고받았다.


“우와... 사장님. 이제 전을 진짜 잘 부치시네요, 저희 사장님께 시드니 전집 2호점 내달라고 하시지 그래요?”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인데요? 그럼 제니가 와서 도와줄래요?”

“사장님이 저 스카우트하실 건가요? 얼마 주실 건데요? 히히...”

“얼마면 돼요? 제가 시급 두 배로 드릴게요, 당장 2호점 냅시다.”

"어? 우리 사장님이 저 시급 많이주시는데 정말이세요?"


주이가 빤히 지켜보는 걸 알면서도 넉살 좋게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는 주이는 질투심도 뭣도 아닌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어제도 저랬나? 나랑 촬영할 때보다 더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데?’


주이는 괜한 기색이 들킬까 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괜스레 머리를 여러 번 쓸어 올리고, 손으로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촬영은 부지런히 이어졌다. 마침내 가게 마감 시간이 임박했다. 촬영 속도에 맞추느라 팔지 못하고 남은 전은 손님과 스태프들에게 서비스로 나눠준 뒤 하 PD가 영업종료를 선언했다. 제작진들은 모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미리 준비를 했는지 구석에서 스태프 한 명이 샴페인까지 터트렸다. 최재수는 하 PD가 긴 촬영이 끝날 때마다 샴페인을 터트리면 작품이 대박난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며 주이에게 귓속말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주이와 제니, 최재수는 머리를 맞대고 사흘간 매출을 점검했다. 현금 매출은 거의 없었고 카드가 대부분이었지만 5일 간 약 $1,000의 매출을 올렸다. 촬영이 목적인 영업이었으므로 전의 판매가 적어 최재수가 벌어들인 수입은 평소 매출액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 PD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시드니전집에 설치했던 각종촬영장비들을 일사분란하게 철수한 뒤 촬영 첫날 갔던 한인 식육식당으로 모였다. 시드니에 맛집은 많지만 모두의 기호를 만족시키기에 삼겹살만 한 것이 없었다. 현수는 수고한 스태프들을 위해 특별히 테이블 마다 두부김치찌개를 서비스로 내줬다. 첫날과 달리 제니와 최재수가 나란히 앉았고, 주이 옆에 하 PD가 앉았다. 주이는 하영석 PD에게 인기 예능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거장의 아우라를 느꼈다. 이렇게 유명한 PD가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자리를 어색하게 고쳐 앉았다. 하 PD는 그런 주이에게 공손히 잔을 건넸다.


“사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협조를 아주 잘해주신 덕에 무사히 촬영 마쳤네요.”

“별말씀을요. 저에게도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제가 살면서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요. 배우님이 클로버를 많이 받아서 앞으로 엄청 바빠지면 좋겠어요.”

“저희가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의미로 다 같이 건배하시죠! 갑자기 사장님! 파이팅!”


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제작진들이 감독의 건배사에 서로 잔을 부딪혔다. 최재수는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잘 구워진 삼겹살을 야무지게 상추에 싸서 주이와 제니에게 각각 내밀었다. 주이는 두 손으로 그가 싼 쌈을 받아 입에 넣었지만 제니는 입을 ‘아’ 벌려 최재수가 주는 쌈을 받아먹고는 엄지 척을 내밀었다. 주이는 자신이 이틀, 제니가 사흘을 함께 보냈으니 그가 제니와 더 친해졌을 테고, 제니가 훨씬 붙임성이 좋으니 그와 서슴없이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언제 들어가시나요?”


주이가 최재수에게 물었다.


“원래 내일 제작진과 함께 들어가는 일정이었는데, 촬영 때문에 주변 관광을 통 못해서 저는 항공권을 3일 정도 연장했어요. 사장님이 가볼 만한 곳 추천 좀 해주시겠어요?”

“아.. 그러셨구나, 시드니에 가볼 만한 곳이야 아주 많죠. 근데 스태프분들은 다 내일 돌아가시는 건가요? 촬영 때문에 관광도 제대로 못하셨을 것 같은데...”


주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 PD를 쳐다봤다. 그는 추석 연휴에 맞춰 방영해야 되니 촬영이 끝나도 편집과 제작회의를 하느라 주변 관광지를 둘러볼 짬이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다음 에피소드도 촬영이 코앞이라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주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도시, 시드니의 정수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제작진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 PD가 스태프들과 한 잔 하러 자리를 옮기고 제니가 통화로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최재수는 주이에게 휴대전화를 내밀면서 주이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었다.


“사장님,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요. 드릴 말씀도 있고...”

“아... 정말요?”

“괜찮은 식당 예약해 주시면 제가 대접할게요. 비싸도 괜찮습니다.”


주이는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카카오톡으로 친구 추가를 해줬다. 제니에게도 번호를 알려줬을까? 최재수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 건 뭘까? 혹시 고백? 희망회로를 돌리던 주이의 심장이 갑자기 심하게 쿵쾅거렸다. 순간 둘 사이에 비밀이 생겨 주이의 얼굴이 빨개졌고 설마 카메라가 이런 모습까지 찍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며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카메라도, 주이를 보는 이도 없었다. 멀찍이 제작진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하 PD를 포함해 다들 촬영 뒤풀이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주이는 순간 어제 남편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넌 조심해. 잘해준다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고.’


그와 함께 촬영하는 기간 동안 주이는 가랑비에 옷 젖듯 최재수에게 각별한 매력을 느꼈다. 혼자 시드니전집을 운영하는데 든든한 조력자가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손을 데었을 때도 황급히 아이스팩을 챙기러 달려가는 세심함에 마음이 흔들렸다. 주이는 누구보다 최재수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거에도 쑥스러움을 많이 탔고 그 흔한 연애 스캔들 한 번 없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용기를 내서 주이의 전화번호를 묻고 할 말이 있다며 레스토랑 예약까지 부탁한 것은 예삿일이 아닌 듯했다. 주이는 그날 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다가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안절부절못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최재수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10분 먼저 도착한 주이는 어젯밤 내린 결심을 떠올렸다. 만약 최재수가 남편 없이 혼자 이곳에 있는 자신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거절하는 것이 좋을지 멘트까지 생각해 둔 참이었다. 멀리서 최재수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주이는 다시 한번 어제의 결심을 마음에 동여매고 최재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도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주이를 향해 뛰어왔다. 주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많이 기다리신 건 아니죠?”

“네. 그럼요. 이제 일곱 시 인걸요.”


예약자 명을 확인한 뒤 직원을 따라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주이는 특별히 달링하버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자리로 예약했다. 직원은 둘을 연인사이로 착각한 듯 '기념일인가요?'라고 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이가 직원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주이는 미디엄 레어 티본스테이크와 샴페인 한 잔을 주문했다. 최재수는 “Same...”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사장님, 아... 혹시 주이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면 이참에 제가 말을 좀 편하게 놓는 건 어떨까요?”

“정말요? 전 좋아요. 그냥 편하게 제 이름 불러주세요.”

“아, 그럴까? 주이야! 그동안 촬영 잘 도와줘서 진짜 고마워. 내가 평생 이 은혜는 안 잊을게."


주이는 갑자기 말을 놓는 그의 태도에 속으로는 무척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저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저도 오빠 덕분에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감사해요.”

“오빠, 좋다. 이렇게 된 거 오빠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내도 좋겠다.”


최재수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레스토랑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직원이 샴페인을 서로의 앞에 내려놓았고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실은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말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최재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주이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최재수에게도 들릴까 봐 겁이 났지만 태연한 척 물었다.


“왜요? 설마, 저한테 고백이라도 하시려는 건 아니죠? 하하...”

“고백? 음... 고백이 맞지. 솔직하려고 하는 말이니까.”

“진짜요?”


주이의 심장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쿵쾅거렸다.


“응.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네가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약속할 수 있지?"

"네. 노력해 볼게요."

"음... 이번 촬영 있잖아, 감독님 하고 나하고 촬영 첫날 서로 합의를 한 게 있었어. 그게 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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