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는 최재수를 향해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했다.
"오빠도 좋은 밤 보내세요."
오빠라니, 또 한 번 ‘재수오빠’에 얽힌 에피소드가 떠올라 주이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최재수는 소리 내어 웃는 주이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주이가 최재수의 손을 잡으니 그가 부드럽게 손을 흔들었다. 주이는 최재수의 따뜻한 감촉이 남은 손바닥을 펴서 ‘안녕’ 손짓하고 서둘러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재수의 표정이 달보다 환해졌다.
“주이야, 종종 연락할게. 진짜 고마워.”
주이는 그의 마지막 인사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는 얼른 가라고 손짓하고는 뚜벅뚜벅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최재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발길을 돌렸다. 잠시 뒤 주이는 최재수가 갔는지 끝까지 확인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 생각을 고쳐먹기 위해 산책이 필요했다.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주이는 최재수의 뜻밖의 고백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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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은 내가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기 전부터 나랑 잘 알던 형이었어. 내가 잘 나갔을 때 형이 기획한 예능에 출연하면서 친해졌거든. 형은 내가 다시 연예계에 복귀할 수 있게 여러 번 다리를 놨는데 잘 안 됐어. 뭐 좀 해보려고 하면 꼭 중간에 여자 문제로 이상한 소문이 나고... 뭐 하여튼 이번 촬영이 마지막 기회니까 진짜 잘해보자고 약속을 했어. 이번 촬영에서 멜로 배우 이미지를 잘 뽑아야 로코(로맨틱코미디)에 캐스팅될 확률이 높다고 해서, 내가 이번에 촬영하면서 너한테 좀 뭐랄까...”
최재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였다. 주이는 머뭇거리는 최재수를 보며 싸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를 좀 이용하신 거네요?”
“이용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에 맞는 이미지를 뽑아내야 하니까 의도하고 저한테 잘해주신 거란 말이죠? 혹시 감독님이 저랑은 하루만 촬영하기로 했다가 이틀로 연장한 것도 그것 때문인 거죠?”
최재수는 차가워진 목소리로 되묻는 주이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 냉기가 흘렀다. 이윽고 미디엄레어로 구워진 스테이크 접시가 둘의 앞에 하나씩 놓이면서 최재수가 침묵을 깼다.
“네가 내 팬이라고 말해줘서, 나도 솔직하게 말한 거야.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감독님에게 이런 의도가 있었다는 것도 네가 몰랐을 거야. 속이거나 이용하려던 게 아니라 네가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어. 물론 우리 의도가 성공할지 여부는 방송이 나가봐야 알겠지만 네가 방송을 보고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미리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았어.“
주이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샴페인잔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괜찮아요. 전.”
“정말,..괜찮아?”
“저야 오빠 팬이니 오빠가 잘 됐으면 좋겠고, 저한테 나쁘게 한 것도 아니고... 진심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저한테 잘해주신 거잖아요. 전 좋았어요.”
“진심이었어. 네가 내 팬이라고 말해줘서 더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고.”
주이는 속으로 이게 맞나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최재수의 고백에 달리 반응할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고백은 주이의 시나리오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재기에 주이를 이용했다고 해도, 만약 주이 덕분에 최재수가 잘 된다면 그것은 팬으로서 기쁜 일이지 않은가. 문제는 방송에 주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였다. 한국에 있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타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오빠가 멜로 이미지로 잘 나오는 건 좋은데 전 유부녀잖아요. 만약 그런 의도라면 방송에 나갈 제 모습이 좀 걱정되는데요? 저희 남편과 시부모님도 다 보실 텐데...”
“아, 그건 하나도 걱정 안 해도 돼. 이래 봬도 그 형이 이 바닥 베테랑이라. 방송 전까지는 일급비밀인데, 내가 일방적으로 주이 너한테 좋은 감정을 느끼는 설정으로 나갈 거랬어. 근데 딱 거기까지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야. 너한테 피해 가는 일 절대 없을 거야. 그건 내가 목숨 걸고 보장할게.”
최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절대 걱정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알겠어요. 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니 저도 안심이 되네요.”
“그래. 스테이크 다 식겠다. 얼른 먹자.”
주이는 마지못해 스테이크를 썰면서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연예계를 생각했다. 최재수는 인기 많은 리얼리티 예능은 다 짜인 각본이 있다며 예능계의 현실을 폭로하고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주이는 치열한 방송세계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방식이 다 이런 걸까 싶어 씁쓸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도를 얼마든지 편집할 수 있는 언론과 방송계. 자연스럽게 촬영한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대본이 있었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노련한 감독과 제작진이 의도한 대본에 맞게 반응할 것이다. 최재수에게 주이는 자신의 재기를 위해 세팅된 방송의 출연자일 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최재수의 재기에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가여웠다. 문득 최재수의 팬으로서 충만하게 행복했던 십 대의 자신이 떠올랐다. 온 마음을 다해 최재수를 좋아했고 용돈이 생길 때마다 그의 사진이 찍힌 굿즈를 사 모았던 시절.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원해서 여한 없이 누군가를 좋아했던 시절. 주이는 과거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십 대 최주이! 최재수랑 결혼까지는 안 하길 잘했다.’
5일 간 낯선 이의 삶에서 조연이었던 주이는 이제는 자신이 주연이었던 무대로 복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꽤 차가워진 밤공기에 재킷을 여미며 서둘러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