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까지 가자

by 새이버링

마침내 <갑(甲) 자기 사장님!> 시드니 편 1화가 방영을 시작했다. 한국시간으로 밤 11시, 주이와 아이들, 제니는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현지시각 새벽 한 시에 본방을 사수해야 했으므로 늦은 오후에 낮잠을 자둔 터였다. 5일간 시드니전집의 일상이 어떤 결과물로 방송될지 사회자의 진행에 기대감과 초조함이 고조됐다. 빨간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무 MC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연휴 특집으로 방영되는 <갑(甲) 자기 사장님!>, 오늘 모실 분은 25년 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대세 꽃미남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패널들의 박수와 함성 속에 베일에 싸였던 그가 스튜디오에 등장했다. 패널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 오늘의 주인공이 누군지 몰랐다는 듯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주이는 '저것도 다 대본에 있겠지...'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위풍당당 행진곡을 배경으로 등장한 최재수는 깍듯하게 방청객과 패널들을 향해 90도 인사를 했다. 화면을 통해 본 그의 모습은 학창 시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부가 좋아서일까? 화장이 아주 잘 먹은 듯 보였다. 이어지는 영상은 그의 필모그래피, 리즈시절의 사진, 그리고 현재 쿠팡맨으로 활동하는 근황이었다. 제니는 최재수의 리즈시절을 보고 “와... 젊을 때 진짜 인기 많으셨겠어요. 요새 아이돌 뺨치는 외몬데요?”라며 감탄했다. 주이도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항공샷으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등장했고, 패디스마켓에 위치한 코딱지 만한 주이의 시드니전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드니에 전집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시드니전집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촬영을 신청했다는 사회자의 소개에 주이는 화들짝 놀라 제니를 쳐다봤다.


“제니가 촬영신청했던 거예요?”


제니는 이렇게 된 이상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냐는 표정으로 얼른 방송을 보라고 주이를 채근했다. 분명히 제니는 촬영제안을 받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먼저 제니가 사장님의 허락도 없이 프로그램 참여 신청을 보냈고 마치 하 PD로부터 먼저 제안을 받은 것처럼 그와 손발을 맞춘 것이었다. 주이는 왜 그랬냐며 캐묻고 싶었지만 주이와 최재수가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주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화면 속 주이는 실물과 달라 보였다. 움직임도 어색했고 웃는 표정도 부자연스러웠다. 주이가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는 장면, 최재수가 밀가루를 바닥에 엎지르는 장면 등이 프로그램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화면 속 제니는 나이 들어 보이는 주이와 달리 젊고 싱그러웠다. 제니는 확실히 화면발을 잘 받는 외모였다.


1화는 제니처럼 최재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의 과거를 소개하고 시드니전집의 사장이 되기 위해 주이로부터 도제식 교육을 받는 과정이 방영됐다. 역시나, 최재수가 고백한 대로 멜로 캐릭터를 소화하기에 부족함 없는 최재수의 연기가 돋보였다. 다정한 그의 손짓과 세심한 배려,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미소 등 종합멜로세트에 가까운 편집이었다. 아들 민준이 주이에게 물었다.


“엄마, 저분이 엄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순수한 아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제작진의 의도는 적중한 듯 보였다. 주이는 전혀 아니라며 아들에게 말했다.

“저분이 원래 멜로드라마 캐릭터가 강해서 그래. 모든 사람들에게 저렇게 친절하셔.”


천만다행인 것은 주이가 최재수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방송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최재수의 고백을 들은 바로 그날, 방송에서는 자신이 최재수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절대 노출하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최재수는 절대 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총 2부작으로 구성된 <갑(甲) 자기 사장님!>의 1화 방송이 끝나자 주이의 휴대폰은 지인들의 메시지로 바쁘게 알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동창들의 메시지였다. 그중에는 ‘토니와이프’로 통했던 유정이의 메시지도 있었다.


‘대박, 최주이. 드디어 만났구나. 니 남편 최재수!’


주이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제발 그것만은 비밀로 해주라. 너 소문내면 너 죽고 나 죽고야!ㅎㅎ'

_

2화가 끝나고 최재수는 역대 출연자 중 가장 많은 클로버를 받았다. 그 덕에 로코퀸 이민아와 주말 연속극 <내 과거가 어때서>의 주연을 떡하니 맡게 됐다. 극 중에서 최재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가세가 기울어 온갖 고초를 겪은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새침하지만 마음은 여린 재벌 3세 여자를 만나 행복을 찾는 시놉시스였다. 최재수는 드라마 촬영을 비롯해 각종 예능에도 출연하면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 됐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최재수는 시드니전집 촬영 에피소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특히 그의 재기를 도운 일등 조력자로서 사장인 주이를 칭찬했다. 그는 주이를 ‘따뜻한 면모의 사업가이자 상담가’로 묘사하면서 한눈에 반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자연스레 시드니전집과 주이는 최재수의 후광에 힘입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시드니전집 인스타그램 계정의 팔로워는 일주일 사이에 2만 명이 넘었고, 시드니전집을 알아보고 찾아오는 한국인 관광객도 늘어났다.


하영석 PD의 의도는 이랬다. 최재수가 재기할 기회를 얻으려면 그의 이미지를 새롭게 세탁할 필요가 있었다. 활동을 중단했던 그가 갑자기 시드니 전집에 등장한다. 최재수가 할 일은 사장인 주이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겸손한 태도로 그녀에게 동정을 얻어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최재수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청자들은 사장인 주이에게 감정 이입을 시작한다. 방송 내내 최재수를 배려하고 세심하게 챙기는 주이의 몸짓 하나하나를 보여준다. 서툴던 최재수가 차근차근 제 몫을 해나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주이의 마음에 시청자의 마음이 투영된다. 최재수는 본인이 가진 매력을 최선을 다해 발산했다. 훈훈한 눈웃음과 사연 있어 보이는 눈빛, 외국인에게 뒤지지 않는 훤칠한 키와 외모로 주이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충성했다. <갑(甲) 자기 사장님!> 2회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SNS는 최재수 관련 기사로 떠들썩했고 그는 이미 재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 PD의 의도가 완벽하게 적중했다. 시청자들은 최재수는 물론 사장인 주이의 매력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주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최재수와의 대화 장면을 편집한 영상 덕분이었다. 최재수가 주이에게 드러낸 사심은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사레들린 주이를 위해 서둘러 물을 가지러 가다가 밀가루를 바닥에 흘리는 허술하지만 소탈한 모습, 손님을 응대하는 주이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나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주이를 존중하는 겸손한 표정, 손이 데었을 때 야단법석하며 구급함을 찾는 모습. 영업 중간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척하며 패디스마켓에서 주이가 좋아하는 납작 복숭아를 사 오는 로맨틱한 그의 모습이 숏폼에 담겼다. 타이틀이 '제발 둘이 잘 되게 해 주세요.'인 숏폼은 500만 뷰를 달성했으나 댓글은 엇갈렸다. '사장님은 유부녀거든?', '최재수 여자친구 있다던데?' 등등 각종 루머와 관심이 댓글로 몰렸다. 주이는 5일간 촬영한 영상을 의도에 맞게 편집한 제작진이 흡사 마술사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멜로드라마 배역을 따내기 위해 주이를 이용한 하 PD의 전략이라니. 과거에도 그랬듯 어쩌면 그 과정에서 최재수가 주이에게 호감을 느낄지도 모르니, 하 PD는 촬영 첫날 최재수의 목을 가볍게 조르며 촬영 의도를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주이가 힘든 시간을 보낸 최재수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은 주이 또래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고 하 PD의 전략에 마중물이 됐다. 그 결과 시청자들이 보낸 클로버 수는 20만 명이 넘었고, 그중에서 40대 여성이 보낸 클로버가 가장 많았다. 그 자리에서 주말 연속극 주연 및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확정됐다. 이로서 주이는 최재수의 재기를 도운 일등공신이 됐다.

짧게 편집한 주이의 리액션은 SNS에 널리 전파됐다. 최재수가 "제가 솔직히 그때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거든요."라고 이야기할 때 주이가 "그런 상황이 되면 누구나 죽고 싶을 거예요.”한다던가, 힘든 시기를 보낸 경험을 말하며 울컥할 때 "힘내세요." 같은 응원보다 주이가 함께 눈물을 글썽인 것, 최재수가 “쿠팡맨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은 할 것 같은데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더워도 마스크를 썼어요”라고 서글픈 표정을 지었을 때 주이는 “아니 왜, 제일 잘 생긴 쿠팡맨이 됐으니 쿠팡에 광고비 요구하셔야죠, 마스크가 웬 말?”이라고 응수하며 그를 웃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숏폼에서는 전문가가 등장해 공감의 심리학 이론까지 인용하면서 주이의 공감능력을 추켜세웠다. 최재수는 <갑(甲) 자기 사장님!> 참여 소감을 말할 때 사장인 주이와의 솔직한 대화 덕분에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따뜻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제작진이 만들어 낸 ‘최재수 흥행’ 프레임이 절정에 달했다.


“좀 부끄럽다... TV프로그램은 참 별것 아닌 걸로 유행을 만드네. 언니, 그치?”


주연과 통화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고 발코니로 나온 주이의 손에 시원한 맥주가 들려 있었다.


“네가 평소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해! 어쨌거나 너에겐 잘 된 일이지. 내 동생이 TV스타가 됐잖아! 내가 촬영하는 걸 봤어야 했는데 못보고 오다니, 진짜 아쉽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유명해져서 부캐가 생긴 것 같아. 본캐가 들키면 무지 창피할 텐데... 아휴...”

“네 본캐가 어때서? 난 어딜 가도 내 동생 자랑하는데? 내 동생 장점을 알아봐 준 제작진에게 감사해야지. 너 이참에 네 유튜브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니? 호호..”

“그런 건 아무나 하냐? 그리고 나는 지금 호주에 전 부치러 왔거든?”


주이는 문득 몸에 안 맞는 꽉 끼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녀인데 시드니에 전 부치러 온 것도 모자라 하루아침에 이런 관심을 받다니. 호주를 방문하는 유튜버들은 앞다투어 주이를 만나고 싶어 했다. 시드니전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셀카봉을 들고 라이브방송을 하는 인플루언서도 있었다. 잡지나 신문기사 인터뷰는 호주에 있는 주이를 배려해 화상 미팅이나 국제 전화로 진행됐다. 한국에 언제 돌아올 건지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여기저기서 광고문의도 들어왔다. 주이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대답을 미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진혁은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며 서둘러 2호점, 3호점도 내라고 부추겼다.


“사장님, 진짜 대단해요. 우리 이러다 대박 나서 달까지 가는 거 아니에요?”

“달까지 가자구요? 이게 다 제니 덕분이죠. 근데, 어쩜 그렇게 날 감쪽같이 속여요?”

“에이, 사장님! 이제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결국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잖아요? 사장님 덕분에 제 유튜브도 구독자 수가 십만 명 달성을 앞두고 있어요!”

“세상에! 그럼 이제 제니의 꿈을 이루는 거네요!”


제니의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 수가 10만 명이 되면서 당당히 인플루언서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는 시드니 전집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에피소드를 전보다 더 당당하게 각색해 올릴 수 있었다. 맛있게 전 부치는 비법도 짧게 편집해 올렸고, 손님과 대화 나누는 장면은 영어 자막과 함께 올렸다. 주이는 크리에이터가 꿈인 제니의 통통 튀는 편집 능력에 감탄했다. 그녀가 최근에 올린 <갑(甲) 자기 사장님!> 촬영 비하인드 영상은 '좋아요'가 무려 300만 뷰를 넘어섰다. 제니의 유튜브를 보고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오고 싶다는 구독자가 많이 늘었다. 그녀는 틈틈이 라이브방송을 진행했고 맞춤형 워킹홀리데이 상담도 했다. 방송이 나간 지 2주 만에 주이와 제니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재밌는 사실은 두 사람의 손에는 여전히 뒤지개와 계란이 쥐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주이는 소고기에 밀가루를 묻혀 육전을 부쳤고 제니는 계란을 풀었다. 하루에 부칠 수 있는 전은 한계가 있으니 크게 수입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라곤 둘 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상태라는 것. 전을 부치는 주이의 손놀림이 가벼워졌고 제니는 계란을 풀며 콧노래를 불렀다. 기분 좋은 일은 구독자 수와 함께 매일매일 늘어났다.


그러나 들뜬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결정이 주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keyword
이전 25화결혼까지는 안 하길 잘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