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의 이야기

by 새이버링

방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은 제니는 노트북을 켜고 아이클라우드에 접속해 오늘 촬영한 영상들을 불러왔다. 20분짜리 영상 2개, 45분짜리 1개를 5분 이내로 압축하기 위한 세리머니를 시작한다. 냉장고에서 갓 꺼내 들고 온 맥주 한 캔을 따고 벌컥, 벌컥, 벌컥 세 모금을 들이켰다.


“캬... 크억.”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트림에 놀라 귀엽게 웃으니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쓰고, 몸이 두 개는 더 들어갈 만한 펑퍼짐한 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단단히 고정한 뒤 엄숙한 표정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흡사 오락실에서 한 판 붙을 기세가 달아오른 초등학생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제니, 지금 우리 카드게임할 건데, 같이 안 할래?”

“언니, 나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미안. 이따가 꼭 껴줘.”

“라면도 먹을 건데, 그것도 이따가?”

“아니, 라면은 안 돼. 다이어트.”

“얼마나 걸려?”

“최대한 빨리 해볼게. 오늘은 50분, 도전!”


오른손을 불끈 쥔 제니는 응원의 주먹을 내보이며 사라지는 룸메이트 지호를 보며 찡긋 웃었다. 두 달 전 4주간의 홈스테이를 마치고 시티에서 살 방을 구했을 때, 레지스 타워 세컨드룸에는 제니보다 한 살 많은 유학생 지호가 살고 있었다. 침대 두 개, 책상 두 개, 행거 두 개가 전부인 네 평 남짓한 방에서 지호와 제니는 함께 먹고 자고 지내며 가족보다 끈끈한 사이가 됐다. 제니가 사는 서른여섯 평의 집에는 마스터룸과 두 개의 세컨드룸이 있는데, 한국인 셰프 부부가 이 집을 렌트해 마스터룸을 쓰고,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서 온 시즈코&히로시 커플, 그리고 지호와 제니가 세컨드룸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으레 금요일 밤이면 다 같이 둘러앉아 카드게임을 하거나 한국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셰프 부부가 뽐낸 요리로 야식을 즐겼다. 제니는 본방 사수하듯 ‘해피 프라이데이 나잇’을 기다렸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갑(甲) 자기 사장님!>이 방영된 이후 제니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가 9만 명을 넘어섰다. 그녀의 채널이 이렇게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시드니전집 손님들과 영어로 대화 나누는 장면을 편집한 브이로그 덕분이다. <갑(甲) 자기 사장님!> 방송 이후로 가장 높은 조회수는 10만 회를 넘어섰고, 영상을 더 자주 올려달라는 구독자의 댓글알람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유튜버가 되겠다는 제니의 꿈이 막 이루어지려던 참이었다.

제니가 처음 시드니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밤마다 제니는 지호와 함께 손님-직원 상황극을 벌였다. 회화실력이 수준급인 지호는 영어실력이 부족한 제니에게 손님이 요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를 시뮬레이션하며 영어표현을 가르쳤다.


“Can I have 육전 for take away?(육전 포장 될까요?)”

“Sure, How many?(그럼요, 몇 개 포장해 드릴까요?)”

“Four, Please.(4개 주세요)”

“If you buy 4, You can get $4 off(4개를 사시면 $4를 할인해 드려요.)”

“Awesome! Thank you.(최고네요. 감사합니다.)”


전과 함께 음료를 구입하면 50센트를 할인해 주고, 전을 4개 이상 포장하면 4달러를 할인해 주는 상황극을 연습했다. 지호는 손님이 왔을 때 물어볼 수 있는 각양각색의 질문을 제니에게 던졌고 제니는 언제 손님에게 기습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며 지호가 알려준 표현들을 외우고 또 외웠다. 전집에서 일한 지 2주쯤 됐을 때 지호는 그녀가 가르친 표현들을 제니가 실전에서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너 아무래도 잘하고 있는지 내가 봐야겠다. 돈 계산 틀리고 그런 건 아니지?"

"나도 내가 맞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야야, 그럼 너 찍어와. 네가 주문받는 거."

"동영상을 찍으라고?"

"그래, 원래 면접도 잘 보려면 자기가 말한 거 찍어서 연습한다잖아. 너도 네가 맞게 하는지 한 번 찍어보면 알 거 아니야."

"사장님이 허락하실까...?"

"영어 더 잘하고 주문 더 잘 받고 싶어서 그런 건데, 당연히 허락해주지 않을까?"


다음 날 제니는 영업에 지장이 없도록 조건부 허락을 받은 뒤 촬영을 시작했다. 계산대 앞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세워두고 자신의 얼굴만 나오도록 한 다음 전날 지호와 연습한 표현들을 집중적으로 말했다.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지호는 깜짝 놀랐다. 촬영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제니의 영어 실력이 부쩍 향상한 게 영상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쩬! 너 이 억양 너무 섹시한데? 이거 유튜브에 올려도 되겠다.”

“아후, 언니, 이렇게 못하는 영어를 창피하게 어떻게 유튜브에 올려. 내 시드니 브이로그에 망신이야. 나중에 잘하게 되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부끄러운데.

“무슨 소리야, 못하는데 잘하게 됐으니까 그런 걸 올려야지. 쩬, 이제는 좀 다르게 해 봐.”

“다르게?”


제니는 지호의 말이 낯설지 않았다. 그날 오후 꿈이 뭐냐고 묻는 사장님에게 자신의 꿈이 유튜버인데 구독자가 늘지 않아 고민이라고 답했을 때, 사장님이 했던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르게 해 보라는 말. 제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촬영한 영상 중 지호에게 칭찬받은 영상을 골라 간단히 편집해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쉬운 영어 표현이라 자막도 넣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제니는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깨워 어제 올린 영상 조회수를 점검하고는 깜짝 놀랐다. 하루아침에 구독자가 100명이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세 달이 넘도록 늘 기미도 안 보이던 하루 만에 100명이라니, 제니는 믿을 수 없었다. 신이 난 그녀는 찍어 둔 영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편집해 올렸다. 판매 장면을 찍어 유튜브에 올릴 생각을 하니, 영상의 컨셉을 의식해 전보다 더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했고 한 번씩 농담도 섞어 유쾌한 대화를 이어갔다. 손님의 근황을 묻고, 사장님 몰래 서비스를 얹어 주기도 했다. 그 덕에 단골이 생겼고 친구도 생겼다. 영어 실력은 저절로 늘었다.


종갓집의 막내로 자란 제니는 제사와 각종 행사로 시끌벅적한 대가족을 떠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1년이면 제사를 열 번도 더 지내는 대가족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학 밖에 없었다. 하지만 5남매 중 막내인 제니에게 부모님이 수 천만 원을 유학자금으로 내줄 리 만무했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친 제니가 휴학 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가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제니의 엄마는 “이제 전은 누가 부치니?”였다. 지긋지긋한 제사노동에서 벗어나 제니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유튜버가 되는 것'이었다.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게 취미였던 제니는 새로운 삶을 유튜브에 올리며 돈을 벌 방법을 찾고 있었다. 소위 잘 나가는 유튜버들의 방식을 따라 해봤지만 재미도 없고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시드니 일상이 전부였던 <제니's 시드니로그> 채널은 자막이 딸린 손님-직원의 매력적인 대화 영상들이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구독자 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제니의 채널에 <갑(甲) 자기 사장님!>의 섭외 광고 댓글이 달렸다. 구독자가 수가 늘면서 부쩍 제품 광고 제안이 들어오긴 했지만 전부 무시해 왔던 제니는 방송 출연이 달린 섭외 제안에 당장 DM을 보냈고, 방송국 PD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사장님을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겁 없이 신청은 했지만 수락을 받고 보니 제니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고심한 끝에 제니는 방송국 PD를 설득해서 꼭 시드니전집에서 촬영을 하고 싶어 한다는 메시지를 제니의 채널에 댓글로 달아줄 것을 간청했다. 제니는 사장님께 우연히 제안을 받은 척 댓글을 보여줬고, 사장님은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이 아니냐며 거짓말 말라고 했지만 출연자가 최재수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촬영을 허락했다.


TV출연으로 세상에 알려진 딸의 모습을 본 제니의 엄마 김여사는 전 부치는 게 싫어 호주로 떠난 막내딸이 전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전 부치는 게 싫어서 호주로 떠났다면서. 시드니 전집?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

“나 거기서 전 안 부치거든?”

“전집에서 전을 안 부친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전은 안 부치는 조건으로 거기서 일하는 거야.”

“어이가 없다. 전집에서 일할 거면 빨리 한국 들어와!”

“싫어! 나 여기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호주까지 가서 전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이 못마땅한 김여사는 한시바삐 귀국을 권했지만 제니는 이제야 자신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며, 엄마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고 말했다. 실제로 제니는 한 어학전문 앱 회사로부터 광고 제안까지 받은 상태였다. 친절하게 영어자막까지 제공되는 손님-직원 대화 영상은 딱딱한 영어회화 영상보다 구체적이고 실감 났기 때문에 회화 공부에 관심이 많은 구독자들에게 크나큰 동기부여가 됐다.


_‘이거 중독성 있는데요? 제니 님 목소리 짱 좋아요.’

_‘호주에선 손님들이 진짜 친절하네요. 제가 일하는 카페는 저런 손님 없는데...’

_‘와, 진짜 시드니 전집 저도 꼭 가볼 거예요.’

_‘제니 님, All good? 이 표현, 입에 착 붙어요.’

_‘이런 아르바이트라면 당장 하고 싶어요.’

_‘이 영상 100번 돌려 보면서 영어공부 중이에요. 더 많이 올려주세요. 제발...’


수많은 댓글이 제니의 다음 게시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라이데이 나잇 야식 이벤트보다 더 중요한 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일이었다. 제니는 빠른 손놀림으로 오늘 촬영한 영상을 편집했다. 영상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검색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비트에 맞게 고개와 어깨를 흔들었다. 더 재밌는 에피소드를 도전해 볼 생각에 시드니 전집 출근이 기다려졌다. 제니에게 매일매일이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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