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의 이야기

by 새이버링

2024년 1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를 킹스포드 스미스 공항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수지는 부재중 DM을 확인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최근 활발하게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올리고 있어서인지 이곳저곳에서 협찬 문의가 들어왔다. 대부분 관심에서 벗어난 요가 용품이나 화장품 협찬 문의라 가볍게 무시했다. 수지의 관심은 오로지 시드니 부동산을 향해 있었다. 코로나 시국을 통과하면서 이미 유동인구가 많은 시드니 전역의 상가 매물들은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수지는 아직 가격 상승의 가능성이 있는 보석 같은 매물에 관심을 갖고 시장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몇 개의 DM을 건너뛴 수지는 시드니의 상가를 알아보는 한국인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시드니에서 전집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


‘뭐야? 설마,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고 싶다는 사람이 또 있다고?’


자신에게 DM을 보낸 여자의 계정에 접속해 사진들을 살폈다. 주로 아이들의 일상을 기록한 계정이었다. 엄마로 추측되는 여자의 얼굴이 있는 사진은 모조리 클릭해 확대해 보았다. DM을 보낸 사람이 혹시 그녀가 기억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의심은 결국 사실로 확인되었다. 20년쯤 지났을까. 정면으로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지만 수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도 있었던 그 보조개를.



2005년 8월,

수지는 용인의 한 중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여중생이었다. 친구들과 하굣길에 떡볶이를 사 먹던 중 부모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졸음운전으로 갑자기 핸들을 꺾은 트럭이 수지 부모님이 탄 경차를 들이받았고,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지에게는 호주로 이민 가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형의 죽음으로 갈 곳을 잃은 수지를 호주로 데리고 와 키우게 된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녀가 없었던 작은 어머니의 의지가 컸다. 작은 어머니는 수지를 딸처럼 키우고 싶어 했고, 수지에게 자신을 ‘엄마’라 불러 달라고 했다. 부모님을 잃은 깊은 슬픔에 영어 한마디 못하는 낯선 타국 생활까지 얹어지면서 작은 아버지 부부의 따뜻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수지의 우울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른 새벽부터 카페로 출근해야 했던 작은 아버지 부부는 일이 바빠 수지의 공립학교 생활을 살뜰하게 돌보지 못했다. 수지는 몇 명 안 되는 또래의 한국 학생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복통과 우울증을 핑계로 학교를 빠지기 일쑤였으며, 어떻게 구했는지 혼자 숨어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자녀를 키워본 적이 없는 작은 어머니는 그런 수지를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답답한 심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앨리스가 들어왔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오른쪽 볼에 보조개가 짙게 파인 한국인 여자였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여서 주인공의 이름을 따 지은 영어 이름이라고 했다. 작은 어머니는 앨리스에게 수지를 자신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무심하게 고개를 꾸벅하는 게 인사의 전부였던 수지와 앨리스는 며칠 뒤 트레인 역에서 마주쳤다.


“어? 안녕? 너 수지맞지?”

“...”

“시티에 놀러 가는 거야?”

“...”


말을 걸어도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대꾸도 안 하는 수지를 본 앨리스는 민망해하며 억지 미소를 짓느라 오른쪽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더 말했다가는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는지 앨리스는 목에 걸고 있던 mp3를 만지작 거렸다. 시티로 향하는 열차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열차칸에 탑승했다. 수지는 앨리스의 뒤를 따라 앨리스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열차가 출발했다. 마주 보고 앉은 수지가 앨리스를 향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담배 하나만 사 주면 안 돼요?”

“왜 담배가 피우고 싶은지 답을 알려주면 사줄게.”

“...”

“그게 무슨 맛인지 알기나 해?”

“몰라요. 그냥,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아서요.”

“뭐야? 너 혹시 죽고 싶니?”


앨리스의 질문을 받았을 때, 수지는 적잖이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 냐고 묻고 싶었지만 담배라도 피워야 살 것 같다는 말을 뱉은 뒤였기에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대답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앨리스는 가방에서 뭔가를 찾더니 카드묶음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카드를 허공에 대고 대사를 읊듯 말했다.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 너희들은 카드 묶음에 불과해!”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수지를 보며 앨리스도 환하게 웃었다.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이거 봐봐. 이 카드에 보면 왕도 있고 여왕도 있고 조커도 있거든? 근데 그래봤자 얘네는 카드묶음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단단히 묶어서 가방에 넣고 다니는 거야.”


앨리스가 카드를 펼쳐 보이고는 다시 밴드로 꽁꽁 묶고 수지에게 내밀었다.


“사줄게.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다는데 사람 하나 살리지 뭐. 대신 사장님한테는 내가 사줬다고 하면 안 돼, 알겠지?”


수지는 앨리스가 내민 카드를 받아 밴드를 풀고 카드를 만지작 거렸다. 어릴 적 부모님과 카드게임을 즐겨했던 수지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익숙하게 카드를 섞었다. 손에 쥔 카드를 펼쳤다 모았다를 반복하니 묘한 쾌감이 일었다. 열차가 타운홀 역에 도착하자 둘은 함께 내렸다. 앨리스는 플랫폼 출구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수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말보로 라이트 한 개를 사 왔다. 팔짱을 끼는 척하면서 수지의 교복 재킷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었다. 수지는 진짜로 사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까 그 대사 뭐라고 했죠?”

“응?”

“카드묶음...”

“아, 너희들은 카드묶음에 불과해! 이거?”

“그 말, 언니가 지은 말이에요?”

“아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야. 너 읽어봤어?”

“너무 어릴 때 읽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읽어보라곤 못하겠다. 그게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보다 실제로는 책이 훨씬 두껍거든. 죽겠다는 애한테 책 읽으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지? 너 근데, 내가 담배 준 건 너네 엄마한테 절대 비밀이야. 나 그럼 겨우 아르바이트 구했는데 잘릴 수도 있어.”


앨리스는 손바닥을 펴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수지는 ‘풉’하고 웃었다.


“그걸 어떻게 말해요. 우리 엄마 죽어요.”


수지는 저도 모르게 작은 어머니를 엄마라고 말한 것을 짧게 후회했지만 이 여자 앞에서 말을 고치고 이유를 해명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난 집에 갈 건데...”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아, 그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너... 비밀 꼭 지키는 거다.”


앨리스가 사준 담배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 수지는 금연을 결심했다. 앨리스가 했던 말을 자주 곱씹고, 카드를 만지작 거렸다. 수지가 조금씩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을 도서관에서 원서로 읽었다. 책의 마지막에서 앨리스가 말했던 대사를 발견했다.


“Who cares for you? You’re nothing but a pack of cards!(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 너희들은 카드 묶음에 불과해!)”


수지는 앨리스의 억양을 기억해 내며 영어 대사를 외워 말했다. ‘팩 오브 카즈’라고 말할 때 묘하게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로도 우울감과 열등감이 밀려올 때마다 카드를 만지작 거리며 작은 소리로 대사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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