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아빠랑 떨어져 지내야 해?”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는 중 아들 민준이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고기 뷔페를 먹을 생각에 들떠 있다가 자리에 없는 가족 한 명이 문득 그리워진 것은 주이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게... 아빠 많이 보고 싶니?”
“영상통화를 하긴 하지만 아빠도 여기서 같이 저녁 먹었으면 좋겠어. 친구들이랑 사촌들도 보고 싶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잘 지내시겠지?”
“엄마는 너네가 학원 안 다녀도 되니까 좋아하길래, 한국이 그리운 줄도 몰랐네?”
“여기도 좋아, 재밌고. 나 호주 체질인가 봐. 음식도 잘 맞고 애들이랑 축구할 때도 별로 안 싸워.”
“한국에선 많이 싸웠어?”
“한국에선 축구 잘하는 애들이 나 못 한다고 무시하고, 안 끼워줬는데, 여기서는 체육 시간에 하도 축구를 많이 해서 내 실력이 제일 좋은 것 같아. 흐흐...”
민준은 제 자랑을 해놓고 쑥스러웠는지 고개를 으쓱하며 웃었다. 달링하버 앞 멕시코 식당 Braza디너 뷔페에서는 소, 양, 돼지, 닭 등 각종 고기 바비큐와 과일, 디저트까지 무한대로 먹을 수 있다. 다양한 바비큐를 들고 돌아다니는 직원에게 눈빛을 보내면 접시에 고기를 잘라 담아준다. 모처럼의 외식에 민준이 욕심을 부리며 고기를 잔뜩 받았다. 민서는 종류별로 고기를 한 점씩 받아 천천히 맛보고 있었다. 주이는 한창 클 나이의 아이들이 맛있게 저녁을 먹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이렇게 평화롭고 좋은 순간 남편 진혁도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준은 시드니에 온 뒤로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이곳 생활에 잘 적응했다. 아빠의 빈자리를 자기가 지켜야 한다며 예민한 동생도 잘 돌봤고 한국에서와 달리 엄마의 집안일도 곧잘 도왔다. 교회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입학하게 된 시드니 공립학교에는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 친구들이 많아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 없이 친구를 사귀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민준은 자기가 호주 체질이라며 계속 살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랬던 민준이 며칠 전부터 부쩍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안부를 묻고 아빠와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엄마도 잘 모르겠어. 언제까지 시드니전집을 할 수 있을까?"
파인애플을 갈아 넣은 듯 새콤달콤한 소스 맛 샐러드를 포크로 뒤섞으며 주이는 힘없이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얘들아! 엄마는 곧 엄청나게 성공할 거야!” 하며 자신만만하게 앞날의 창대한 계획을 일장연설했을 그녀인데, 처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리는 엄마를 보고 민준이 물었다.
“엄마, 우리 한국엔 언제 갈 거야?”
“언젠간 가야지? 엄마도 아빠랑 할아버지, 할머니 다 보고 싶어. 너처럼 친구들도 그립고.”
“엄마도 가고 싶어?”
“아들, 엄마가 시드니에 왜 왔다고 했지?”
주이는 갑자기 민준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엄마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민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정답! 부자가 되려고!”
옆에서 나이프로 고기를 썰던 막내 민서가 외쳤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주이는 민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준도 그런 동생이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뻗었지만 동생은 오빠의 손을 매정하게 거부하며 공격태세를 갖췄다.
“또 싸운다...”
매서워진 주이의 눈빛에 민준은 시작하려던 장난을 멈추고 주이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전집이 TV에도 나오고, 부자 된 거 아니야?”
“TV에 나온다고 부자가 되는 건 아니야, 이 정도로 부자라고 하긴 어렵지...”
“그럼 엄마는 얼마나 벌고 싶은데?”
“음... 일단 얼른 부지런히 먹어, 더 맛있는 음식이 계속 나오고 있잖아?”
아들의 질문은 시드니에 전집을 차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어 온 질문이다. 주이는 여전히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온전히 주이의 의지로 시작은 했지만 끝은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시드니전집을 차리면 우리는 부자가 될 거라고 허풍 섞인 선언을 해 왔다. 주이는 피부가 검게 그을린 건강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지금이 ‘부자’행 열차의 간이역 어디쯤이 아닐까 생각했다. 부자가 되면 누리고 싶었던 행복과 지금의 행복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부터 낮 3시까지, 주이의 의지로 정한 시간에만 일했고 초과 근로는 거의 없었다. 일주일에 세 번 장사를 마친 뒤 어학원에 갔고, 어학원에 안 가는 날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햇살이 어둠을 밀어내는 아침에는 하이드파크에서 산책을 하고 매일 색다른 카페에서 향긋한 바나나브레드에 플랫화이트 한 잔을 마셨다. 수업이 없는 오후에는 책 냄새가 가득한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아이들과 텀바롱 공원에서 놀다가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주말이면 맨리비치 선착장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하루 종일 패들보트를 타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게으름을 피웠고, 동네마다 열리는 마켓을 어슬렁거리며 눈호강을 누렸다.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가능한 호사였다.
각박한 사교육 시장을 벗어났기에 아이들과 공부로 다툴 일도 없었다. 시드니 공립학교에서는 한국에서 사교육으로 했던 여러 교육들을 무료로 제공했다. 예체능은 물론 발표회나 조별 체험활동, 공모전 등은 아이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재밌는 활동을 영어로 하니 영어 실력은 자동으로 늘었다. 이곳에서는 숙제나 성적으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잔소리도 줄었고, 늘 아이들과 사이가 좋았으며, 매일 같은 옷을 입어도 쇼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오히려 지출이 간소했다. 더 적게 소유했는데 마음은 풍요로웠다. 계산기를 두들겨볼 때, 한국의 생활비와 사교육비를 합한 비용이 이곳에서 드는 생활비와 별 차이가 없는데도, 만족도는 갑절이 높았다. 주이는 이곳의 시간은 유한하다고 여기며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고 잠도 여섯 시간을 넘겨 자지 않았다.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삶이 이곳에서는 가능했다. 어쩌면 모두가 살고 싶은 인생, 꿈꾸는 행복은 이런 게 아닐까.
전남친과의 재회, 극적인 방송출연, 어릴 적 우상을 만난 사건은 주이가 시드니에 전집을 차린 일과 비할 바 못 되었
이곳의 시간은 주이의 인생에서 다시없을 황홀한 시간이겠지만 아이들에겐 좀 달랐다. 한참 아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성장기 아이들을 엄마만 좋자고 아빠 없는 이곳에 계속 묶어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아예 정착할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면서 적당한 때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잠깐 머무는 것과 정착해서 사는 것은 비자문제 등 장기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많아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여기서 정착한다면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이질감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주이도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리링..."
수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주말에는 거의 연락한 적이 없었는데, 뭔가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언니, 주말 잘 쉬고 있나요?"
"네, 아이들하고 달링하버에서 저녁 먹고 있어요. 수지는요? 즐거운 주말 보내고 있나요?"
"저는 새로 시작한 부동산 클래스가 반응이 좋아서 오늘 진짜 바쁜 하루를 보냈어요! 언니에게 빨리 전화하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화하네요."
"새로 시작한 클래스라니, 지난번에 말한 후배양성 프로젝트인가요? 와, 멋진데요?"
"겨우 열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클래스인걸요 뭘."
"아니,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수지의 클래스를 들으러 귀한 시간을 낸 건데요. 시작이 반이다, 몰라요? 이런 과정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게 성공이죠.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빨리 전화하고 싶었다니요?"
"네. 하루라도 빨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 아침에 작은 아버지께 연락이 왔거든요. 2주 뒤에 호주로 돌아오신대요. 작은 어머니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빠르면 다음 달부터 가게도 운영하실 계획이래요. 그래서 말인데, 시드니 전집 이전할 매물을 좀 알아볼까요? 전보다 임대료가 많이 오르긴 했지만 또 찾아보면 좋은 매물이 있을 거예요."
"아... 잘... 됐네요. 그치만 매물은... 그건 제가 좀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요."
"네, 언니.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고마워요."
주이는 수지 덕분에 어릴 적 품었던 꿈을 이뤘다. 유치한 꿈으로 묻힐 뻔한 주이의 어릴 적 꿈은 수지가 작은 아버지 가게를 빌려주지 않았다면 절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 주이와 아이들을 기다리는 한국의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섞여 밀려왔다. 기약도 없이 이곳에 정착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때가 되면 멈춰야 할 순간을 저절로 알게 될 거란 사실을. 주이는 그 순간이 머지않음을 확신했다. 고기를 다 먹은 아이들은 놀이터로 달려갔고, 달링하버 저편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