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하기 하루 전날, 잠들기 전 2호가 캐러멜 같은 표정을 짓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나 너무 기대돼.”
“뭐가? 우리 내일 여행이?”
“아니, 공항 라운지가.”
피식. 나는 웃음이 터졌다. 내가 얼마나 오래 준비한 여행인데, 이 꼬마를 기대하게 만든 것이 고작 공항 라운지라니. 하지만 나는 안다. 공항 라운지는 일반 뷔페와 다르다는 것을.(오죽하면 내가 공항 라운지의 인테리어나 뷰를 그대로 흉내 낸 뷔페나 식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겠는가.) 타국으로 향하는 한국인이 공식적으로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며,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고단했을(광주-인천까지 무려 4시간가량 운전하고 온) 우리의 피로를 달래고, 잠시 숨을 고르며 여행의 설렘을 충분히 만끽하는 게 어떻겠냐고 마련한 장소다. 남편과 나는 이러한 효능에 200% 공감하기에 각자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포함된 신용카드를 쓰지만 아이들의 이용료는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적지 않은 비싼 공항 라운지 이용료(제휴 혜택 할인가 1인 3만 2천 원)가 아깝지 않으려면 공항 체크인을 서둘러야 한다.
출국게이트 너마저,
체크인 카운터는 보통 이륙 2시간 전에 열린다. 우리는 카운터 오픈 시간에 도착하여 최대한 서둘러 짐을 부치고 보딩패스와 여권을 손에 꼭 쥔 채 출국게이트로 향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30분. 공항 라운지에 도착하기 위한 관문이 하나 더 남았다. 출국 게이트. 마침 우리가 간 출국 게이트는 게이트 밖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더디게 보였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로서는 애가 탔다. 우린 라운지에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아침도 안 먹고 4시간을 운전해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에는 여러 개의 출국게이트가 있다. 짐을 부치고 바로 보이는 게이트는 4번이었다. 일단 줄을 섰고 멍하니 게이트 입구 위 전광판을 응시했다. 지금 내가 줄을 선 출국게이트는 4번 게이트의 동편인데, 대기 시간이 약 40분 정도라고 했다. 나와 아이들은 울상을 지었다. 여기서 40분 이상 지체한다면 라운지에서 30분 내외 머물게 되고, 자리 잡고 앉아 음식을 떠 오면 게눈 감추듯 먹고 나와야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거면 공항 라운지를 왜 가나,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 하지만 어차피 기내식으로 끼니를 때워도 된다고 생각한 나와는 달리 2호 꼬마의 오늘 하루치 목표는 공항 라운지가 아닌가. 나는 필사적으로 출국 게이트를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대기 시간을 알려주던 전광판에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다른 게이트의 위치와 실시간 대기 시간이 나타났다. 화면은 짧게 머무르더니 다른 정보를 안내하는 화면으로 금세 바뀌었다. 잠깐, 지금 게이트별 대기 시간을 알려주는 건가? 나는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인천공항이 전 세계 2위 공항이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승객들의 시간절약을 위해 게이트별 대기시간을 알려준다고? 믿을 수 없었다. 1분 정도 흘렀다. 게이트별 대기 시간을 알려주는 화면이 또 떴다. 내가 서 있는 게이트의 대기시간은 36분이지만 3번 동쪽 게이트는 17분, 2번 서쪽 게이트는 10분이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가족들을 이끌고 2번 게이트로 향했다.
진짜 그 정보가 맞는지, 게이트별로 대기 시간이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 있는 건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2번 게이트로 빠르게 이동했다. 뛰듯이 걸은 덕에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2번 게이트는 아까 줄을 섰던 게이트 보다 줄이 훨씬 짧았다. 아니, 거의 줄을 안 서도 입장이 가능할 만큼 대기자가 적었다. 나와 2호 꼬마는 만세를 불렀다. 우린 살았다! 이제 10분 전후로 출국 수속을 별문제 없이 마치면 라운지에서 한 시간은 보낼 수 있겠다. 1분을 들여 30분은 아낀 셈이었다.
보딩 타임을 약 한 시간 남겨두고 떡볶이와 컵라면 등 3만 2천 원에는 턱없이 모자란 음식들을 떠 온 아이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얘들아, 엄마가 게이트를 옮기지 않았다면 우린 아마 지금도 줄을 서고 있을 거야. 그럼 라운지는커녕 비행기도 겨우 탔을 걸?”
어묵꼬치를 우적우적 씹어 먹던 2호 꼬마를 비롯해 아들과 남편은 나의 생색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출국 게이트에서 시간을 절약했지만 라운지 입장과 음식을 골라 떠오는 시간들을 제외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아까 줄 섰던 출국 게이트 근처를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대기 시간을 알려준 전광판의 친절함을 떠올린다. 세상은 어디까지 편해질 수 있을까. 기다림을 싫어하는 인간의 불편을 기계가 또 한 번 해결했구나. 어디선가 서양의 한 교수가 한국에 대해 말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인은 불평불만이 많은데 그것이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한다. 불편함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것의 원인을 찾아 내 해결 방안까지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치킨을 배달하면 조리 중인지 배달 중인지 알 수 있음은 물론, 맛집 앞에서 하염없이 웨이팅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한국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출국게이트 너마저...
우리는 어디까지 편리해질까?
숨까지 쉬어주는 날이 올까.
비행기가 타국으로 날아가기 전까지 우리의 목적은 라운지였기에 목적에 충실한 우리는 공항 라운지를 최대한 즐기고 보딩타임 라스트콜에 맞춰 숨차도록 뛰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숨차도록 뛰어 가까스로 비행기를 탔다. 야무지게 창가자리를 선점한 2호 꼬마가 내게 묻는다.
엄마, 에어컨 틀어줘??
지금은 2월이고 겨울이란 것을 공항에 오면 까맣게 잊게 된다. 에어컨이라니. 나는 뛰어 오느라 조금 더웠지만 에어컨 까지는 괜찮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에어컨 틀 수는 있어?) 드디어 비행기는 이륙했다. 우리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호주 퍼스(Perth)였는데 중간에 마카오와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일정이었다. 아들이 새삼스럽게 물었다.
“엄마, 왜 우리 요즘 경유만 해?”
지난여름에 떠났던 말레이시아도 중국의 샤먼이란 지역을 경유해 갔다. 비행기값은 경유지가 많을수록 대체로 저렴해진다. 4인 가족의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긴 하지만 여행이 꼭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을 의미할까. 나에게 있어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지를 고르는 순간부터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그 여행을 준비하는 순간을 통과하여 여행지에 도착하는 것까지의 여정도 전부 포괄한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준비하는 일이 고되지 않았고 경유지를 거쳐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도 커다란 즐거움이 됐다. 다양한 항공사의 비행기에서 기내식 레스토랑을 즐기고, 나는 하늘 위 도서관을 편애한다. 특히 2호 꼬마는 방문국에서 제 여권을 스캔하거나 지문검사를 하는 등 입출국 심사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를 즐긴다. 기다리는 시간에는 한국에서 미리 저장해 온 웃긴 콘텐츠를 당당하게 시청하며 이때만큼은 순순히 아빠 엄마의 지시를 따른다. 경유지에서 이들은 공항 내 PC방(의자에 앉아 패드보기)을 순회한다. 일어나라고 하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따른다. 나는 오로지 이 여행에서 아이들이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한다. 마침내 여행지에 도착하면 오랫동안 심상화했던 그 모든 것들을 부지런히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른 아침 잠든 아이들을 두고 아침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 투어, 공원에서 버거 먹기, 자전거 투어, 하루에 2만 보 걷기, 일기 쓰고 잠들기와 같은 소박한 일상을 사는 것...
그런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 생각한다. ‘우리 어디로 여행 가?‘라는 질문의 답은 ’우리 호주가, 싱가포르 가.‘ 이런 게 아니라.
공항 라운지. 하늘 레스토랑이나 하늘 도서관이 가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라고 말해도 되겠다고. 2호 꼬마는 유난히 하늘에서 먹는 식사를 즐긴다. 아직 파우더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꼬마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은 변주곡을 듣는 일만큼 스펙터클하고 달콤한 사탕을 아껴서 빨아먹는 일만큼 아쉽다. 늦지 않으려 앞서서 뛸 때도 고개를 돌려보면 쫄래쫄래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꼬마가 보인다. 꼬마가 여행을 제 방식대로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두어 달의 월급을 이 여행에 다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호사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