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 증발되기 원하는가?

연극 <어느 날 문을 열고>

by 소행성 쌔비Savvy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는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인 이곳에서 '이치로'는 밤이사 업체를 운영한다. 그의 이사는 조금 특별하다. 의뢰인에게 새로운 신원, 새로운 환경을 제공하여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신분세탁형 이사다. 그의 의뢰인은 대부분 삶이 고단해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치로는 그들을 절망에서 구해내 살아있되 증발된 삶을 살도록 돕는다.


'메구미'는 이곳 뒷골목에서 새벽까지 식당을 운영한다. 이치로가 보낸 증발자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정착을 돕는다. '린'은 십삼 년간 증발한 상태로, 메구미의 식당에서 일한다. '켄'은 이십 년째 증발하여 청소노동자로 살아간다. '마야'는 증발 이후의 삶도 이전의 삶도 놓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려한 환락가 거리로 의문의 '소년', 선물을 든 '시즈오', 녹음기를 든 '시오리'가 찾아온다.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었고,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이 폭력이 멈춘다면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간절히 증발을 원할 것이다. 지난 6월 상연된 고선웅의 작품 <유령>은 바로 이런 상황을 다뤘다. 유령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면 <어느 날 문을 열고>는 증발한 사람과 남겨진 사람 모두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이다. 사라진 사람을 찾아다닌 시즈오와 시오리가 이를 증명한다. 스스로 증발된 사람들은 나름의 삶을 살지만 남겨진 그들의 가족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느 날 문을 열고>는 레나 모제의 <인간증발>을 김주희 작가가 극작을 했고 2025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프로젝트 작품이다. 곽지숙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연기는 작품의 상상력을 증폭시켰다. 다리밑인지 동굴인지 알 수 없는 미아리예술극장은 이 작품을 공연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출입문을 열면 바로 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와 면한 이 극장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작품은 시종 어둡고 무겁다. 대사와 연기는 깊고 진했다. 좋은 희곡이 담백하고 빠르지 않게 연출되었고 내공을 지닌 배우들이 이를 적절히 소화해 전달해 주었다.


작품을 보면서, 보고 나와서 내 삶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증발되길 원했던 적이 있었나? 그랬다면 언제, 왜 그랬나?’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기회를 갖는 게 연극을 보는 기분이다.


김주희 작

임범규 연출

신승렬 무대디자인

신동선 조명디자인

곽지숙 남수현 이준영 김진영 곽영현 안주영 이하영 성근창 출연

프로젝트 1인실 작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평택항 산업재해를 다룬 하수민 작연출 <앤드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