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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활 채집

딸린 식구 없는 딸의 돌봄 노동은 당연한 일인가?

<잔소리 약국>_김혜선 소설

by 소행성 쌔비Savvy


지인이 책을 내면 일단 산다. 그리고 읽는다. 중간에 덮기도 한다. 간혹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추천하기 곤란한 책을 만날 때이다. 김혜선 작가의 첫 책 <잔소리 약국>은 그런 면에서 너무 다행이다. 추천할만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노동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며 자의든 타의든 비혼으로 나이 드는 여성이 증가했다. 그리고 그런 여성 중엔 딸린 식구가 없다는 이유로 부모 돌봄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며 부모의 끼니를 챙기고 봉양에 드는 비용도 지출해야 한다. 이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잔소리 약국>의 저자 김혜선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 돌봄를 전적으로 맡았다. 그의 어머니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약국문을 열어야 한다는 분이었다. 작가는 엄마의 끼니는 물론 아침저녁 출퇴근을 전담했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말이다.


“웬만한 회사에서 퇴직할 나이 50대. 뭘 해도 은퇴할 나이 80대. 그래도 아직은 삶의 출퇴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일하는 엄마를 보고 자랐고,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나이가 됐다. 일하는 여성끼리 함께 살면서 계속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서로를 돕는 것 외에 어떤 해결책이 이 삶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이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헤쳐 나갔다. 그 사이 모녀는 싸우고 화해하고 미워하며 의지하는 관계를 반복한다. 가족이란 굴레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녀의 애증이 한 줄기라면 약국 집 딸이며 영화 저널리스트라서 가능한 관찰과 해석은 이 책의 또 다른 줄기이며 핵심 메시지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이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박쿠스’의 이름을 딴 박카스는 현대사회를 비집고 들어온 노동의 음료다. 피로를 이기려고 마시 는 사람은 많아도, 신나게 놀려고 마시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약국의 쓰레기통에는 박카스 병이 무수히도 쌓인다. 얼마나 많은 이가 여기에 기대고 있었을까. 이 병을 모두 거대한 비닐봉지에 담아서 내 가게 앞 재활용 쓰레기‘로 내놓을 때조차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엄마가 다친 후로는 몇 년째 약국에 드나들며 박카스를 사 가는 손님 한 분이 쓰레기통 한가득 담긴 병들을 약국 앞길에 내놓아 주신다고 한다. 어떻게 그분이 올 때에 맞춰 쓰레기통이 꽉 차는 것인지. 순전히 엄마의 관점에서지만, 불가사의한 인연이다.

그때 그분에게 박카스는 공짜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노동으로 꽉 꽉 채워져 있는 박카스는 내게 단순한 피로회복제가 아니다. 살면 서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노동의 파트너다.”


약국에서 판매되는 각종 약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이를 통해 들여다보는 현대 노동자의 숙명에 대한 해석은 이 책의 별미다. 이 파트만 떼어 내용을 보강해 한 권의 책으로 내도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지난봄에 돌아가셨다. 단정하고 정확한 성격처럼 담백하게. 그러나 남겨진 작가는 돌봄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로 남겨진 갖가지 일을 처리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내용도 좋지만 글 맛도 좋다. 자전적 소설이지만 에세이에 가까워 읽기도 부담 없다. 돌봄 노동에 있는 이들이 읽으면 많은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영화 이야기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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