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더디 지던 어느 날, 나다움이 태어나 처음으로 흠이 되었다. 나의 갈색 눈동자, 나의 검은 머리칼이 악의의 대상이 된 그날. 아스라이 흰 벽 위로 노을빛이 쏟아지던 그날.
나는 로마의 작은 식당에 앉아 알리오올리오 한 그릇을 시켰다. 단 돈 만 원으로 이 도시의 낭만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자릿세를 낼 의향이 있었다. 올리브 향이 볼끝을 감돌았다. 달큼하고 쌉싸름한 오일은 금세 깨끗이 비워졌다. 그걸 빨리 먹기 트로피처럼 내 앞에 전시해야 그들이 계산서를 가져올 것이었다.
20분, 30분, 40분…
시계는 잔인하게 오늘을 깎아내렸다. 달달 다리를 떨며 웨이터를 부르고 싶었지만, 이곳의 예의범절이 내 손을 묶었다. 곧 눈썹을 찌푸린 나를 봤는지, 마침내 종업원이 다가왔다. 아니, 나를 지나쳐 식사를 마친 부부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스치고 흘겼다. 나는 불쑥 찾아온 길고양이처럼 투명해졌다.
기다림의 시간은, 무시의 절댓값이었나.
순간, 내 안의 온기가 식어가다 이내 끓는 듯한 분노로 치환되었다. 직선적인 혐오의 말보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악의가 더 불쾌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제삼자의 자리를 벗어났다. 관찰하던 내가 그들의 시선에 올라섰다. 그러니 나 또한, 어떤 반작용을 줄 수 있겠지.
나다움이 죄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나인 것이 흠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보호구역이야.
나는 그들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는 틈을 타 현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떴다. 그건 이곳의 예의에 한참 어긋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달려와서 욕을 한다거나 경찰을 부른다거나 하는 불미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스레 통쾌하고 경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기억 저편의 목소리를 떠오르게 했다.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할 순 없어.
그러니 넌 너대로 살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그들을 위해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를 삼킨다던가, 눈치를 보랴 제약된 행동을 한다던가. 그건 아무래도 실례였다. 하나뿐인 보호자이자 동반자인 나에게. 생각이 꼬리를 물 수록 꺼져가던 의지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환영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나는, 모두의 박수가 아니라, 내 안의 리듬을 따라 노래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묻어두었던 바람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현실의 벽이 날 가로막아도 상관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노래하면, 그곳이 곧 무대였다.
그때 띠링— 하고 문자가 울렸다.
굳센 결의에 하늘이 답신을 한 걸까.
너 노래하는 거 좋아한다며, 여기 한번 나가봐
눈을 비비고 다시 문자를 확인했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기회였다. 심장이 쿵쿵 울릴 때마다 발걸음도 총총 빨라졌다. 차가운 물보라가 튀어 정신을 차려보니 트레비 분수 앞이었다. 하늘에 파문이 일어 차별의 상흔은 지워지고, 꿈의 실재가 다가왔다. 이제 관객석에서 벗어나, 무대 위에 설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