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이는 무지개색 계단을 딛고 들어선 공간은 '바'보다는 '서재'에 가까웠다. 빽빽한 책장 사이로 낡은 나무 탁자가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고, 사람들의 속삭임이 나지막이 웅웅거렸다. 오렌지빛을 닮은 노란 조명이 묵직한 책등을 비추는 풍경. 그 아늑함에 빳빳하게 굳었던 어깨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때, 맑은 목소리가 낯선 정적을 깼다.
“안녕, 혹시 오늘 공연해? 리허설은 저쪽이야.”
그녀의 손끝을 따라 안쪽의 작은 문을 열자, 낯선 공기가 훅 들어왔다. 아늑한 서재는 온데간데없고, 보랏빛 조명이 쏟아지는 작은 무대가 나타났다. 짙은 와인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오늘 밤 내가 서야 할 바로 그곳이었다. 녹아내렸던 어깨에 다시금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공연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거대한 첼로 케이스를 멘 학생, 낡은 통기타를 안고 온 학생, 심지어 전자 악기로 즉석 비트박스를 선보이는 이도 있었다. 장르도, 악기도 제각각. 그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로움에 나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그러다 문득,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떠들썩한 활기 속, 검은 머리 동양인은 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전의 흥분은 차갑게 식었고, 나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보이지 않는 벽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어디에서 왔어?"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동그란 안경에 빨간 체크치마를 입은 여대생이었다. '사우스 코리아.' 조심스러운 내 대답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을 아시안계 유럽인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내 앞줄에 앉아있던 남학생에게도 말을 걸었다. 바글바글한 머리칼의 그는 프랑스에서 왔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의 국적은 놀라울 만큼 다양했다. 쓰는 언어도, 피부색도 모두 다른 우리가 '음악'이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것은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가장 따뜻하고 보편적인 유대감이었다.
풍채 좋은 바의 주인이 리허설 시작을 알렸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 목을 풀었다. 아까 그 여학생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 'Old Love(옛사랑)' 부른다고 했지? 한국 노래야?"
"응. 아마 여기선 아무도 모를 거야. 그래도... 기대해도 좋아. 나도 네 무대 기대할게."
본무대가 시작되자 공기가 다시 한번, 농밀하게 바뀌었다. 리허설 때의 수줍고 친근한 모습은 사라지고, 모두가 '프로'의 얼굴을 했다. 첼로 현을 긋는 손끝은 날카로웠고, 통기타를 연주하는 목소리는 관객의 마음을 꿰뚫었다. 비트박스는 바닥을 울리며 심장을 뛰게 했다.
나는 내 순서도 까맣게 잊은 채, 그들의 음악에 완벽히 매료되었다. 함께 어깨를 들썩이고, 낯선 언어의 노래에 코끝이 찡해졌다. 창밖이 완전히 짙은 어둠에 잠겼을 때,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다음은 한국에서 온 학생입니다! 박수 부탁드려요!"
주인장의 우렁찬 독일어 소개에, 생각지도 못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객석은 늦은 밤의 손님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그 따뜻한 소리에 등을 떠밀리듯, 나는 무대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이크 앞에 섰다. 숱하게 잡아온 마이크였지만, 그날은 생경한 '처음'의 떨림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랐다. 유럽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 터무니없던 나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눈부신 조명 너머로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가 나의 첫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구겨놓았던 버킷리스트는 더 이상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조용히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음악을 좋아하는 Sawol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