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돌아오고 있었다 Ⅱ
육지와 산, 바다.. 아빠는 전국을 다니며 일을 했다.
어떤 날은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야 돌아왔고, 어떤 날은 며칠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아빠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적당히만 마시면 괜찮은데 한번 마시면 다음날
일을 못 갈 정도로 마셔댄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잡아놓은 중요한 일정들이 술 때문에 엎어지는 일이 잦았다.
무당들은 번번이 난색을 표했고 고스란히 손해를 입는 상황이 반복되자 그 누구도 아빠를 찾지 않았다.
일이 끊기고, 집에 머무는 날이 많아진 아빠는 눈에 띄게 변해갔다.
그동안 모아둔 돈마저 술로 인한 사건, 사고를 수습하는 데 다 들어갔다.
우리 집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술을 마시면 아빠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고 없이 퍼붓는 폭언, 도망칠 틈도 없이 터지는 폭력.
아빠의 그런 모습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래 왔다고 했다. 단지 내가 어려서 기억을 못 했을 뿐...
언제나 그 앞에 속수무책으로 놓인 사람 중 첫 번째는 엄마였다. 도망치면서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길
수십 번. 힘없고 여린 엄마의 품은 어린 우리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런 엄마에게 아무런 방패도 되어주지 못했다.
오늘만은 제발 조용히 지나가기를...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린 기도였다.
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냥 나가버리지, 왜 다시 돌아와 그 세월을 참고 살았냐고... 체념한 듯, 낮고 잠긴 목소리로 엄마는 말했다.
“늬들이 눈에 밟힌디… 어쩌고 나가야. 늬들 두고 엄마가 어찌 살겄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던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4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가장 늦게까지 그 집에 머물러야 했고 그만큼 오래도록 그 공포 속에 있어야 했다.
언니와 큰 오빠는 사회로 작은 오빠는 군대로 나는 고3을 앞둔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아빠의 폭언과 폭력에 참지 못하고 결국 가출을 감행했다. 솔직히 나도 내가 가출을 할 줄은 몰랐다.
그 시기에 어울렸던 친구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 때문에 엄마가 더 힘들어질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내 마음은 하루도 편치 않았다.
나의 반항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집을 나설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
다니던 학교가 졸업 전에 취업을 나갈 수 있는 실업계 학교라서 나는 곧장 사회에 발을 디뎠다.
그때 내 나이 18살. 그저 그 집으로부터 아주 멀어질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떠났다.
주변에 가로등도 없던 황량한 부지에 밤새 불이 켜진 공장에서 나의 첫 사회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된 하루 뒤에 쉼이 되어주는 기숙사가 오히려 맘은 편했던 것 같다.
아빠는 그 후로도 일을 하지 않았고 대신 엄마가 어렵사리 창호 공장에 들어갔다.
먼지가 진동하는 환경에서 온종일 무거운 창호를 옮겨가며 치수를 재어 재단하는 일을 했다.
연약한 엄마에게 정말 힘든 일이었음에도 그곳은 아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라고 했다.
나는 월급과 보너스를 받을 때마다 생활비를 꼬박꼬박 집으로 보냈다.
그것만이 내가 엄마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휴일을 맞아 시내 번화가로 나갔다.
큰 쇼핑몰 앞에 천막 부스들이 늘어서 있었고 나는 호기심에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은 타로 상담을 해주는 부스였다.
누구에게도 기대기 어려웠던 10대의 마지막 시절, 그 낯선 카드들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상담사가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타로 카드라는 생소한 그림들, 그 잔상은 한동안 내 마음에 여운을 남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래전 타로가 나를 처음 불러준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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