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운명의 수레바퀴

프롤로그 :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돌아오고 있었다 Ⅰ

by 사월




소싯적 아빠는 밴드의 드러머였다.

낡은 앨범 속, 드럼을 치던 아빠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 딴따라 소리를 들을 만큼 밴드 활동은 하찮은 일로 여겨졌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반대는 무척

심했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엄마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함께 살게

되면서 아빠는 밴드 생활을 정리했다.



언니를 낳은 뒤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도움을 받아 튀김 가게도 해보고, 오리 농장도 해보며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했지만 손대는 일마다 번번이 고꾸라졌다. 그렇게 실패가 이어지자 아빠는 다시 방황을 시작했다.

쌀 살 돈조차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며 엄마가 지금도 라면을 멀리 하는 이유다..

그렇게 사는 꼴이 못마땅했던 할아버지는 수차례 아빠를 설득했고, 결국 집으로 들어앉혀 당신이 하던 일을 배우게 하셨다.



나 어렸을 땐 해마다 학교에서 가정호구조사 종이를 나눠줬다.

그때마다 아빠는 ‘부모의 직업란’에 옷장사라고 적었다. 가정 방문 때 혹시 선생님이 물어보면
“트럭에 옷을 싣고 시장 다니며 장사한다”라고 말하라고 내게 당부하기도 했다.

어린 나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물어보면 늘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 시장에서 옷 장사해.”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6학년 때였다.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엄마는 고만고만한 아이가 넷이라 셋방을 내어주려는 집주인이 흔치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사야 하면 되지만 아쉬운 소리 하며 방을 구하러 다니는 게 무척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방을 주지 않는 건 집주인 마음인데 아빠는 그런 일로 엄마를 구박하기 일쑤였다.

내가 6학년이 되던 해에도 이사를 했다.
늘 주인집이랑 함께 살거나 다른 셋방 가족이 있는 ‘한 지붕 두 가족’ 형태가 익숙했기에 이번에도 별다를 게 없었다. 다만 특이했던 건, 옆 셋방이 점쟁이 집이었다는 것이다.



학교를 다녀오니 안방에서 뚝딱뚝딱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뒤로한 채 곧장 안방을 지나쳐 내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와 함께 쓰던 방은 이웃 셋방에 딸린 작은 방이라 우리 집과는 살짝 분리되어 있었다. 밥 먹을 때 말고는 아빠를 마주칠 일이 자주 없다 보니, 오히려 그 거리감이 편했다.

소란이 잦아들어 가보니 이전엔 없던 무언가가 생겨 있었다. 작은 아빠가 안방 한편에 법당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어린 내가 그런 걸 제대로 알 리가 있나. 그저 법당 위에 쌓여있는 과자들만 눈에 들어왔다.

왜 우리도 못 먹는 과자가 거기 있어야 하는지 몰랐고 그저 먹고 싶은 마음만 꾹 참아야 했다.



신당 아래 커튼을 들추면 장구, 징, 꽹과리 같은 국악기들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그것들은

아빠의 일에 꼭 필요한 무구들이었다. 집을 자주 비웠던 이유도 그 무구들을 싣고 전국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일은 무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아빠를 ‘조법사’라 불렀다. 다른 법사들보다 일을 잘해서, 무당들이 서로 데려가려 했다고 한다. 집에서 쉬는 날이면 아빠는 무구를 두드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말을 외우기도 하고 옛날 책

같은 걸 보면서 공부하듯 어려운 한자들을 써내려 갔다.



겹겹이 접은 한지에 조각칼로 부처를 새겨 굿에 쓸 물건을 만들던 모습은 그때의 내 눈엔 정말 신기했다.
가끔은 나도 함께 앉아 색색의 주름지로 연꽃등을 만들곤 했다.
그 시절의 기억만 놓고 보면, 아빠는 어쩌면 장인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아빠는 나쁘지 않은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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