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에도 영하의 기온으로 떨어진 어느 날 저녁, 책모임에 참석하려 집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켰다가 껐다. ‘걸어가야겠다.’ 15분 정도의 거리니까 왕복 30분. 걷기에 그리 버거운 시간도 아닌데 걸어서 외출을 했던 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요상한 마음이다. 왜 하필 한파가 몰아친 이때 걸으려는 걸까.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것만큼 싫은 게 또 없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며 걷기 시작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정신이 번쩍 드는 찬바람이 뇌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것 같았다. 싫은데 좋은 것. 그것은 바로 겨울이다.
추위를 많이 타다보니 옷을 겹겹 (일곱 겹까지) 껴입는 게 습관이 됐다. 2월 중순 즈음이면 몸에 걸친 옷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져 내가 땅속에 박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땅도 추위에 단단히 얼어버렸으니까. 차갑고 딱딱한 땅의 항거를 받으며 살아있다는 감각이 깨어난다. 내복에 목도리, 장갑, 모자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중력을 꺾어내면서 차가운 공기를 가르면 웃풍이 심했던 시골집, 이불 속에 누웠던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서 기억나는 그 사람.
열 살 때였을까. 엄마는 계몽사에서 나온 위인전집을 들였다. 유관순, 세종대왕, 에디슨, 헬렌 켈러... 지금도 여전히 위인 대열에서 꼼짝 않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아문센’이다. 맞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찍은 노르웨이 국적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 나는 그가 어린 시절 추위에 익숙해지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고 잠을 잤다는 일화에 꽂혀버렸다. 탐험가는 꿈도 꾸지 않았고, 남극도 북극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호기심에 파문이 일어 겨울에 창문을 가끔씩 열어두고 잠을 잤다.
‘아문센 따라하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 적은 없었다. 특별히 수면에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아마도 웃풍이 심했던 시골집에서 매년 겨울방학을 보내며 추위에 익숙해지는 내공을 쌓은 덕분일까. (그렇다고 추위를 덜 타게 된 것은 아니다.) 특히 설날 전후로는 우물이 얼 정도로 추위는 매서웠다. 아궁이에 아무리 불을 때도 장판만 까맣게 타버릴 뿐, 방안의 찬 공기는 가시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이불을 끌어올렸다. 코까지 덮으면 숨 쉬기 불편하니까 딱 입까지만. 그때 콧속으로 들어오던 찬 공기는 오묘하게 안정감을 주었다. 콧등에 손을 대고 온도를 재 본 다음 얼른 팔을 이불 속으로 넣었다.
손등에 느껴지던 코끝의 찬 기운이 나에게는 겨울잠의 자장가였던 셈이다. 추위는 싫지만 한기에 마음이 놓이는 그 이질감은 한낮에 극명해진다. 시야가 밝고, 공기가 맑고, 생각들이 환해지는 겨울에 반소매 차림이면 얼마나 좋을까... 엉뚱하게 자문하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차라리 껴입어도 겨울이 훨씬 낫다고 자답해버린다. 더위에 녹아내릴 듯 시들시들 여름잠을 억지로라도 자야하는 건 무기력하기 그지없으니까. 빙수나 스무디보단 군고구마나 군밤을 훨씬 좋아하는 것도 겨울 쪽에 애정의 무게를 실어주는 게 확실한 건 맞는데.
사건의 기억이 추위 속에서 더 잘 새겨지는 걸까? 감기를 호되게 앓으면서도 입대를 앞둔 친구의 송별회를 위해 기차를 타고 찾아간 1월의 경포대는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함께했던 몇몇은 커플이 되기도 했지만 나에게 딱히 낭만적인 건수는 없었다. 그저 콧물이 얼도록 차가운 바람과 모래사장 위에 바다, 그 위에 하늘이 층층이 쌓인 풍경에 압도되었던 기억 밖에는. 직장인 여의도에서 집이 있는 홍대입구까지 걸어서 퇴근할 때면 서강대교를 건너야 했다. 높은 습도에 쪄지듯 걸을 때보단 세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버스를 탈걸...하고 후회를 했던 겨울날 쪽이 도파민 분비량은 확실히 우위를 점한다. 7월 한 여름, 얼음이 녹아버린 커피처럼 밍밍했던 사랑의 시작보다 엄동설한 한파 특보와 함께 눈물 콧물 쏙 빠지게 매웠던 열애의 마침표 쪽이 분명하게 아름다웠던 것도.
오랜만에 순천만습지를 찾았던 날, 땅에 발을 딛고 바람에 저항하는 기분은 그저 ‘굉장히 춥다’로 압축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습지에서 청둥오리 떼가, 반대편 논밭에서 흑두루미 떼가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는 순간, 눈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운 새들의 비행 사이에서 감탄사조차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내가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경이로운 그 날은 한 여름 같은 장소에서 함께 일출도 보고 갈잎차를 마셨던 어떤 이로부터 곤욕을 치러야했던 기억을 거의 지워버렸다.
겨울. 싫은데도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비교가 되어버린 여름에 미안하긴 하지만 각설하고. 구구절절 읊어댄 겨울찬가도 기실 한 문장으로 족하다. 겨울은 시간을, 계절을, 삶을 환기하기 때문이라고. 그래, 겨울이잖아. 지금의 환기를 오롯이 간직하자. 힘겨운 어떤 날에 즐거운 에너지에 불붙일 심지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