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아몬드>, 창비
얼마 전 TV에 방영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9살 소년이 묘기에 가깝게 기타를 치는 모습을 봤다. 모습뿐만 아니라 소리 역시 기가 막혔다. <공작새>라는 그 곡을 직접 썼다고 했다. 기타 선율은 나의 눈앞에 공작새를 그려지게 하는 진기함을 자아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처음 보는 사람의, 처음 듣는 곡에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주변인들은 그런 나에게 소녀 감성을 꽤 잘 유지한 것인지 아니면 갱년기가 일찍 찾아온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나는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잘 되는 타입이다. 눈물도, 웃음도 헤프다. 이제껏 본 영화의 88% 이상은 눈물과 함께였고, 『아몬드』를 읽으면서도 두어 번 눈물을 흘렸다. 그런 이유로 정작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 윤재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살면서 우리가 꼭 말할 수밖에 없는 ‘고마워’와 ‘미안해’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 그런 윤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프롤로그)
감정 표현 불능증(알렉시티미아). 윤재는 뇌의 일부 중에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작아서 기쁨, 슬픔, 두려움, 화 등을 느낄 수 없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일에 가족이 칼부림을 당한 걸 목격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장애였다. 뚜렷한 치료법은 없었고, 아몬드를 많이 먹는 것은 민간요법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 ‘아무렇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람들은 윤재를 어려워했다. 우리는 곧잘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윤재의 다름에는 인면수심, 파렴치한, 인지상정과 같은 이야기가 아예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윤재에게 곤이라는 돌이 던저졌다. 아, 그 반대라 해야 할까? 어쨌든 그 둘은 인간이 가지는 감정적 반응을 0점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정확히 대척점에 있을 것 같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아이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느껴버린 아이. 『아몬드』는 윤재와 곤이의 성장과 우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도록 하는데 성공한 소설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성장을 한다. 특히 인간의 성장은 아주 복잡하다. 혼자 살 수 없는데다 감정을 앞세운 저마다의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출발선이 다른 윤재의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다. (할멈에 의하면 예쁜 괴물이라는)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사람을 통해 우리 주변을 들여다본 『아몬드』는 오히려 현재 우리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총천연색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윤재가 겪은 사건을 반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선생님이나, 가족이 눈앞에서 죽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 반 친구, 부모를 잃고 험난하게 살아온 아이보다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앞세우는 아빠. 그들을 비롯해 『아몬드』를 읽는 정상의 편도체를 가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인간적인가.
몇 년 전 <쿵푸팬더>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마음에 꼭 남은 단어가 있다. inner peace. 우그웨이 사부는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마음의 평온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무기라고 제자 포에게 일깨워주었다. 그 장면을 마음에 담은 이후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inner peace라는 주문을 속으로 외쳐보곤 한다.
윤재는 처음부터 그런 수련이 필요 없었을 마음의 평온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평온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예 없는 것과 있는데 없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제 알을 깨고 새로운 마음의 평온 찾기에 나선 윤재에게 응원을 보내며, 인간적인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