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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Oct 23. 2021

다정하게 때론 치열하게 - 책모임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


흔히 ‘답정너’라고 일컫는다. 나 역시 경청하지 못하는 ‘답정너’ 중 한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주변에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름의 사회생활을 유지해온 것 같다. 그런 내가 ‘말하는 사람’에서 ‘듣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데는 책모임의 역할이 지대했다. 



스무 살 이후로 다양한 모임을 가졌다. 대학 때는 영화 토론 동아리와 여행 동아리, 직장에 다닐 때는 음악을 함께 듣는 모임, 커피 모임에 참여했다. 모두 혼자서 자발적으로 찾아갔다. 낯선 사람이나 환경을 겁내지 않는 편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길 좋아했기 때문에 학과나 직장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동아리에서 훨씬 활동적이었다. 게다가 목소리가 크고 말하기를 좋아해서 모임의 주축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에서 내 이야기의 시작은 한결같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건...”, “나라면...” 


영화나 여행, 음악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다채로웠다. 감독, 배우, 음악가의 세계관이나 사회적 이슈의 파편들, 낮선 곳에서 느끼는 일탈과 일상을 나눈다는 것은 무척 의미 있었다. 젊기 때문에 사소한 것에도 열정적일 수 있었던 그야말로 청춘의 여정이라 더욱 뜨겁고, 요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나누는 대부분의 것들은 각자의 취향 위에 놓여있었다. 대화도, 타인에 대한 이해도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 



결혼 이후 삶은 오로지 두 아이의 육아였다. 나를 돌볼 틈도 없는 육아 쳇바퀴에서 막 빠져나올 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희생이 아닌 공생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고.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발을 들인 곳은 그림책모임이었다. 그림책을 공부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집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그림책을 학교에서 아이 친구들에게 읽어주는 것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참여할수록 ‘봉사’ 이상의 것들이 다가왔다. 


매주 하루, 오전 8시 30분. 각자 맡은 교실에서 그림책을 한두 권 읽어주고 난 엄마들이 학교 도서관에 모였다. 약 30~40분 정도 그날 읽었던 그림책을 소개하거나, 책 읽는 동안의 교실 분위기에 대해 얘기했다. 먼저 활동한 선배 엄마들은 좋은 그림책을 직접 읽어주며 추천해주기도 했다. 집에서는 늘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만 했는데, 막상 듣는 입장이 되니까 신선했다. 혼자 읽을 때는 안 보였던 그림이 보였고,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이야기가 들렸다. 


그림책 속 이야기에 아이들과 내 마음을 대입하면서 육아의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림책에 여과된 육아 동지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자랑이나 넋두리로 들리지 않았다. 충분한 공감, 진심 어린 조언들이 오가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림책은 항상 반짝반짝 빛났다. 



‘책모임이 이런 거구나!’ 알아버렸다. 다른 책도 더 깊이 접하고 싶어졌다. 우연히 도서관 강연에 참여했다가 서평모임 회원을 모집한다기에 그 자리에서 가입 사인을 했다. 이미 1년 정도 탄탄하게 자리 잡았던 모임이라 적응만 잘하면 됐다. 


『총, 균, 쇠』, 『사피엔스』, 『코스모스』 등 혼자서 읽기 어려운 책들을 함께 읽었다. 『아몬드』, 『돌이킬 수 없는 약속』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호밀밭의 파수꾼』, 『파리대왕』, 『델러웨이 부인』 등의 고전도 책 목록에 포함됐다. 


두껍고 어려운 책은 파트를 나눠 각자 요약정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뒤 서평을 썼다. 읽기, 듣기, 쓰기라는 과정을 거치며 한 권의 책을 세 번 읽는 효과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서평을 접하면서 항상 확신에 차 있던 내 감상과 판단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다른 책모임과 북토크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책모임에서 나누는 주제는 다양했다. 입시 교육, 페미니즘, 언론의 역할과 미덕, 인류의 역사 곳곳의 쟁점과 AI로 대변될 미래 등은 물론 사랑과 죽음, 가족과 친구, 배움과 허영 등 삶의 보편적인 것들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종교, 정치 같은 까다로운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진지한 이야기는 오글린다’고 여긴다면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이라는 지도 위에 펼쳐진 대화는 개인들의 경험, 가치관을 더해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반성을 기반으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는 경험은 생산적인 활동에 버금가는 뿌듯함을 안겼다. 비록 내가, 우리가, 사회가 책 몇 권 읽는다고 바뀔 리 만무하다. 하지만 글은 생각을 부르고, 생각은 말과 행동을 부르며, 그것들을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용기가 배가 되고 변화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를 깨고, 내가 가진 의식을 깨고, 우리가 함께라는 끈을 확인하는 과정. 바로 그것이 책모임의 궁극 아닐까.



다정하게, 때론 치열하게 책을 읽고 대화하며 나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다름’ 앞에서 ‘그럴 수도 있지’와 같은 포용으로 한 발 물러서는 순간 같은 것 말이다. 어떤 쟁점에 대해 총론과 각론, 또는 다양한 각도로 보려는 유연함도 생겼다. 예를 들어 아이 학교에서 급식조리사의 파업문제 관련 안내장을 받았을 때, 당장 도시락을 싸야 한다는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는 파업의 원인이 합당하다면 어떻게 파업을 지지할까 고민해보는 것 말이다. 


독서에 몰두한 지난 몇 년의 시간동안 나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갔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더 작아지게 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이토록 많았구나, 그간 비루한 잘난 체를 하면 살았구나 싶은 자괴감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는 인식이 커질수록 좋은 엄마,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도 함께 커져갔다. 혼자 책을 읽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다정함과 치열함이 가져다 준 선물 같다. 한없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도 변화하게 만든 책모임을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있다. 각성하는 ‘나’들이 모여 함께 가는 길은 아무리 멀어도 쉽게 지치지 않을 것을 믿으며.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인디언 격언을 다시금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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