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 문학동네 (2015)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존재답게
최소한의 공조의 지혜를 찾아가자.
그게 각자의 행복 극대화에도
최선의 전략일 것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선언이라니 자못 비장하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크게는 ‘이기주의’와 비슷한 범주에 들어갈 법한 ‘개인주의’일진데. 나랏일 좀 하신다는 윗분들이나 기업 총수, 조직의 상사들은 물론 웬만한 어르신들에게 그리 반가운 주제는 아닐 것 같다. 물론, 작가의 전작 『판사유감』을 먼저 접한 독자라면 크게 반색할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 이 책의 작가는 현직 판사다. 대한민국에서 다른 이도 아닌 법복을 입은 사람이 선언한 개인주의라니! 궁금하다.
1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나는 그런 사람과 살고 있다.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와!
몇 년 전 친정에 갔을 때 일이다. 휴대전화를 막 바꾼 엄마는 대리점에서 번호를 옮겨주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일일이 번호를 입력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엄마는 마침 처가에 온 사위에게 부탁했다. 그때 남편은 주저 없이 “싫은데요.”라고 대답했다.
“그거 대리점 가서 해달라고 하면 3분도 안 걸려요 어머님. 제가 대리점에 모시고 갈게요. 아니면 새로운 자판도 익히실 겸 어머니께서 직접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이 일화를 듣는 사람 대부분이 ‘싫은데요’에서 아연실색한다. 사위가 장모에게 싫다고 말하다니... 용감하네, 버릇없네, 엄마가 황당하셨겠다 등등. 하지만 그는 지하철에서 짐을 든 할머니를 보면 계단 끝까지 그 짐을 올려드리고, 약속에 늦는 한이 있어도 길 잃은 아이를 경찰서까지 데려다준다. 내가 신발 매장에서 운동화를 신어보다 풀린 끈을 밟기라도 하면 진상 손님이라고 면박을 주고, 딸들이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갈 때는 규칙이 아니라고 저지한다. 남편은 결코 무례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받은 경우 단호하게 거절해야 다시는 서로 중 누구도 불편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한 개인주의자가 선택한 《행복》의 일환이다.
1부에서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하는 개인주의자의 《행복》에 집중한다. 그리고 개인의 행복이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이 ‘관계’라며, 인간은 뼛속까지 사회적 동물임을 주지시킨다. 하지만 그가 (살아)본 대한민국은 군대라는 모델 위에 세워진 맹점을 꼬집는다. 집단주의가 만연하고, 수직적 가치관에 함몰되어, 맹렬한 서열주의로 모두가 경쟁하는, 허례허식 가득한 사회라고 말이다. 여기에 개인의 행복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 학생운동 세력 역시 ‘의장님을 목숨으로 보위하자’는 수준의 전체주의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투사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후배들에게 직장에서의 헌신을 강요하는 꼰대로 변신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p.36)와 같은 우습지만 슬픈 글귀가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개천의 용이 멸종될 것 같은 경쟁 지옥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강남 엄마들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면서. 하지만 강남 엄마들의 드라마틱한 변화만을 고대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합리적 개인주의와 민주시민 의식을 낳았던 ‘근대’를 건너뛴 대한민국이 되짚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먼저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자.
2부. 타인의 발견
‘지금 응대하고 있는 직원은 고객 여러분의 가족 중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영화관에 갔을 때 발견한 안내문이다. 한 대기업의 인상적인 캠페인이 떠올랐다. ‘세상을 바꾸는 연결음’이 바로 그것이다. 고객이 상담원을 기다리는 동안 “사랑하는 우리 아내가 상담 드릴 예정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우리 딸이 상담 드릴 예정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가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등이 녹음되어 전달되었다. 욕설, 성희롱 등을 비롯한 폭언으로 극심한 감정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상담원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연결음’ 캠페인 이후로 스트레스가 54%나 감소되었다고 한다. 역지사지. 우리는 그걸 굳이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됐던 거다. 영화 <카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남편에게 살해당한 베트남 신부, 세월호 유가족들. 그들의 가슴팍에 저런 안내문을 붙이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모욕을 당하진 않았을까?
그렇다. 비뚤어진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을 살짝 비껴나 보면 비극을 마주한 이들을 대하는 구경꾼들도 마뜩잖다. 정규직 되려면 학위 따고 시험 봐야 하는 거 아냐? 외국에서 돈 벌기가 쉬운 줄 알아? 자식 바다에 묻고 어떻게든 보상금 더 타내려고 시위하는 거야? ‘떼쓰면 다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애꿎은 이들에게 향할 때는 씁쓸하다 못해 우울해진다. 작가는 이런 종류의 말들이 무례함을 넘어 흉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오랜 친구가, 40년 해로했던 부부가 말 한 마디로 살인사건의 장본인이 된 예를 들었다. 인간 생사가 대의보다 자존심에 걸린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막말이 비일비재한 인터넷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요지경 속이다.
굴절된 분노의 원인은 《공감》의 부재다. 재판과정에 일조하는 조정의 달인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명확히 드러난다. 평균 조정률은 30~40% 정도인 가운데 80%까지 달성한 조정의 달인은 경청하고, 공감하면서 이승에서는 결코 불가능할 것 같은 원고와 피고의 화해를 이끌어냈다고 했다. 심지어 현재의 많은 인력을 대체할 A.I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 역시 공감 능력이라고 한다. 합리적 개인주의 정착을 위해서도, 애꿎은 비극의 방지를 위해서도, 4차 산업 혁명을 맞이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공감》이라고 작가는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스스로 공동구매하지 않으면 강제배급 받게 될 테니 말이다.(p.194) 공동구매도 사기 당할지 모르니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미래를 품은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말이다.
3부.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
남편과 나는 아이들 교육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래 역시 이민이 답이야.”라고 외치곤 한다. 우리가 이민을 농반진반 자주 논하는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우리 딸들의 10대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입시지옥은 둘째 치고, 남편도 나도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학창시절이 꽤나 괴로웠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회비용을 고려했을 때 이민이라는 선택이 무조건 정답이 아니란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3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벗어난 세상의 불편한 진실에 눈을 돌려본다. 이민지로 핀란드를 살짝 고민해봤었는데 책을 통해 핀란드 아이들의 수학 흥미도가 대한민국 다음인 29위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금 놀랐다. 물론 수학 흥미도가 아이들의 행복 전부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거기도 수포자는 존재하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행복을 논하자면 수학 흥미도 쯤이야 애교에 가깝다.
미국? 거긴 인종차별이 자본주의에 고착된 상황이다. 백인이 유기농 식단에 운동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면 유색인은 정크푸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피하지방만 늘어가는 형편이라고 한다. 간간히 들리는 끔찍한 인종 혐오를 기반에 둔 총기 사고는 또 어떻고. 인도네시아의 1965년 대량학살을 다룬 <엑트 오브 킬링>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자아이가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의문으로 시작된 <와즈다>는 영화의 탈을 쓴 엄연한 현실이다. 뿐만 아니다. 아프리카 곳곳에서 행해지는 여성 할례나, 내전으로 조국을 떠나야 하는 난민들도 있다.
편 가르기와 혐오의 과잉은 결국 불신에 귀결된다. 뒤집어 말하면 건강한 사회의 건설을 위해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단 얘기다. 대한민국에서 민감한 세금을 이야기 해보자. 높은 세 부담을 북유럽 사람들이 감수하는 것은 내가 낸 세금이 효율적으로 쓰여서 반드시 내게 혜택이 돌아온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렴하고 유능한 정부와 공무원들이 오랫동안 실적으로 그런 신뢰를 얻어낸 것이다.(p.256) 이처럼 이상적 국가 모델로 꼽히는 북유럽의 시스템은 사회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유토피아는 차치하고, 그저 더불어 살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책임을 나누고 신뢰를 쌓아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자 선언』은 작가의 인간혐오라는 고백으로 시작해, 이 험한 세상에서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자는 당부로 마침표를 찍는다. 처음엔 <개인>을 이야기하는가 싶지만 결국 ‘사회 안의 개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인권》이라는 단어였다.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결국 《인권》에 대한 쉽고 가벼운 안내서라는 생각이 든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침해받지 아니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는 민주국가라면 모두 헌법에서 격하게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국가가 아닌 곳은 물론, 민주국가라 해도 갖은 편법으로 자행되는 인권침해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작가는 그 경각심을 말하기 위해 인권침해 혹은 인권보호라는 사회 통념적 단어 대신 『개인주의자 선언』을 내세웠을 뿐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행복》, 《공감》, 《신뢰》다. 수많은 문제제기에 통쾌한 해답을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 개의 키워드를 따라가면 길이 보일 것 같다. 행복한 개인들이 만드는 성숙한 사회! 그것으로 진일보하기 위한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