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 『결 : 거칢에 대하여』 | 한겨례출판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자유나 사람됨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의 소유물과 그가 속한 집단, 계층에 관심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가 가진 구매력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어떤 쓸모가 있는가?
노동을 덜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문화의 다양성은 인류 통합에 장애가 되는가?
당신이 이런 논제에 대해 당장 서술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아니, 글이 아니라 말을 해보라 해도 대답할 수 있을까?
『결:거칢에 대하여』에 소개된 프랑스 대입시험, ‘바칼로레아’에 출제된 논제다. 학과에 따라 질문이 다를 뿐, 논제에 대한 서술이 기본이다. 문제가 답보다 길고, 그마저도 객관식이 대부분인 대한민국의 수학능력평가와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 작가도 언급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저런 논제는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다. 혹여 질문을 마주했다 하더라도 먹고 사는데 그리 영양가 없는 한가로운 생각이라는 취급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유추가 자연스러운 이유는 지난 날 괴짜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내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과대학 소속이었던 나는 교양 과목 중 문학 분야 학점을 최고한도까지 채웠었다. 졸업을 앞둔 학기에 국어국문학과 1학년생들의 필수교양을 수강했을 때 일이다. 담당교수께서 첫 번째 과제를 돌려주시며 말씀하시길, “공대 학생인데 글쓰기를 제법 해본 실력이네?” 의도는 칭찬이었겠지만 공대생은 글쓰기를 못한다 혹은 싫어한다 등의 고정관념이 깔린 말이었다.
글을 쓰고, 사색에 잠기길 좋아했던 나는 모든 학창시절 동안, 그리고 사회에서도 별종이었다. 그 시절 나는 ‘사차원’, ‘외계인’ 등으로 불렸는데 요즘은 ‘종특’, ‘아싸’ 등으로 불리나보다. 바칼로레아의 논제를 보고 있자니 ‘프랑스에서 나는 좀 더 행복했을까?’ 싶다. 한 걸을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조국에서 별종으로 사는 게 더 힘들었을까,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게 더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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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을 얻기 위해『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어야만 할 것 같다. 경기중고, 서울대 출신의 작가가 프랑스에서 난민으로 살면서 겪은 소회를 담은 책이다. 1979년 작가 홍세화는 해외지사 근무 중 프랑스로 망명했다. 유신정권 끝 무렵, 공안 사건이자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된 남민전 사건 연루자였기 때문이다.
언론인, 당대표, (장발장) 은행장 등 다양한 직함을 가졌지만, 우리 사회를 향한 질타와 경고, 회유 등을 저술, 번역한 작가로 유명하다. 앞서 소개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비롯해,『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등을 저술했고,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등을 번역했다.
『결:거칢에 대하여』는 작가의 11년만의 신작이다. ‘나’를 짓고 ‘나의 몸’을 소유하는 진정한 자유를 정의하며, ‘회의(생각)’하는 자아를 길러야 ‘나’는 물론 ‘너’를 지켜주는 ‘우리’를 영위할 수 있다고 피력한다. 혐오를 멈추고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투표권 행사와 교육 혁신(대학평준화)이 필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20:80이라는 부의 분배 격차가 더 벌여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자유 위에서 나를 지키고 이웃과 연대하며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말이다.
2012년 겨울, 대통련선거 뒤 나는 3살 된 딸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이 극장에 걸렸다. 두 번을 봤는데 두 번 모두 오열했다.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빅토르 위고 원작은 1862년 세상에 나왔다. 1830년대 프랑스 국민들의 봉기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발장이 주인공이고, 『결:거칢에 대하여』에 자주 예시된다. 국민을 기만했던 정부는 무너졌지만, 2020년 한국의 사회상을 이야기함에 있어 아직도 『레 미제라블』을 언급하며, 많은 이들이 200년 전 프랑스의 현실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또 한 번 무너진다. 작가가 말하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모두의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는 이제 그만 저 멀리 닿지 않을 이상으로 떠나버린 것은 아닌지 싶어서다. 이렇게 『레 미제라블』은 200년 후에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영 정형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울해져서다.
그러다가 다시 책 속의 한 문장을 되새겨본다.
우리는 ‘바위는 확실히 부서진다’는 확실성이 아니라 ‘바위도 부서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행동해야 한다. (p.178)
나는 다시 희망한다. 나를 짓고, 공동체의 건강을 염려하며, 주변에 책을 권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한다. 한 발씩 한 발씩 진보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