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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Jan 28. 2020

슬픔을 나누는 교양 (교양; 가르치어 기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 돌베개


모든 청소년은 학교에 다니고 학생이란 
곧 전부 수능을 치는 예비 수험생으로 여기는 식이다. 
비진학, 탈학교 아이들은 배제되고 
특성화고 아이들은 고려되지 못한다.


현장의 목격 


얼마 전, 친구들과 가볍게 치맥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밤 11시가 넘었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명이 밝게 켜진 술집 앞에 세 명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따귀를 때리고,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말리는 중이었다. 때리는 사람은 온 힘을 실어 절대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맞는 사람은 각을 잡고 “잘못했습니다”를 외치고 있는데, 말리는 사람은 이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폭력 상황에 놀랐고, 아파트 단지 앞이라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더 놀랐다. 가슴이 철렁했는데 때리던 남자가 우리에게 뭘 쳐다보냐며 시비를 걸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아줌마 셋은 말 한 마디도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욕은 뒤통수 너머로 한동안 계속 쏟아졌다. 우리는 112에 신고할까 했지만 아무래도 선후배 사이 같은 저 셋의 이후 사정이 걱정되어 선뜻 전화를 걸지 못했다. 내가 못내 마음에 걸려하자 한 친구가 나를 위로했다. 예전에 폭행 사건을 보고 신고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이 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고 아무도 없어서 친구만 경찰서에 불려갔다고 했다. 


그저 술 취해 벌어진 주사였을까? 우리가 지나간 이후 폭력은 멈췄을까? 맞던 사람은 우리가 경찰을 불러주길 바랐을까? 아니면 경찰을 만났더라도 아무 일 아니라고 얼버무렸을까? 며칠이 지났지만 맞고 있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라 마음이 자꾸 무너져 내렸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못 했... 아니 하지 않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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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동준이가 떠올랐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된 그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갓 스물을 넘긴 2014년 1월, 건물에서 뛰어 내려 세상을 등졌다. 동준이는 고3 10월부터 현장실습으로 진천에 있는 CJ식품 공장에서 일했다. 프로게이머를 꿈꾸던 그는 이른 취업을 하겠다며 마이스터고(특성화고)를 직접 선택했던, 목표가 분명한 아이였다. 하지만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지치고 주눅들었다. 설 명절을 앞두고 12시간씩 고강도 노동을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회식 자리에서는 음주와 흡연을 강요당했다. 급기야 나이가 많은 동기에게 ‘너희가 일을 못해 내가 혼나고 있다’며, 다른 동료와 함께 폭행당했다. 사실을 알렸다가는 아는 조폭들을 동원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지속적으로 받았다. 그러한 압박들을 이기지 못하고 동준이는 삶을 놓아버렸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동준이 사건을 중심으로 특성화고 학생들이 놓인 현실을 다룬 르포다. 동준이 어머니와 이모, 동준이 사건을 담당했던 노무사, 제주 생수공장에서 사망한 이민호 학생의 아버지, 특성화고 교사와 학생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은유 작가는 본인도 특성화고(상고) 출신이라 밝힌 뒤, 겸손한 목격자를 자처하며 현장실습생의 죽음을 전달한다. ‘청소년 노동은 역사적으로 사라진 적이 없다’며 그들의 노동이 격하되는 사회적 시스템과 그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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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놓인 죽음의 노동 


청소년 노동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악의 고리는 무엇일까? 바로 ‘애매한 포지션’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특성화고 아이들은 현장실습이라는 명목 아래 졸업 전에 취업에 나선다. 하지만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놓은 아이들은 학교 측의 보호도, 회사 측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상태다. 때문에 최저임금으로 혹사당하기 일쑤고, 동준이처럼 폭행과 괴롭힘에 노출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자본주의 생태계의 가장 하단에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취업률에 혈안이 된 학교 측은 회사가 연계를 끊을까봐 아이들이 당하는 불합리함을 참으라고만 한다. 


그렇게 학생과 직장인 사이 어딘가 애매하게 서 있는 아이들은 죽음의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인내심 부족하고 성질 더러운 아이들은 박차고 나오기라도 하지.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사망한 청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김용군 씨, 제주 생수공장에서 일했던 이민호 학생 등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이들은 모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말 잘 들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말 잘 들으면 회사에서 이용해먹고 최악의 업무만 시키니까 말 잘 들을 이유가 없어요. (중략) 평소 민호한테는 착하게 살고 남 해코지하지 말고 맡은 일 열심히 하고 살아라, 그렇게 말했어요. 민호는 그렇게 커줬고요. 결론은 말 잘 들으니까 세상을 등지게 되는 거예요. (p.137 고 이민호 아버지 이상영씨 인터뷰 中) 


더 심각한 문제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학교에서 노동인권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곧 현장에 뛰어들 아이들에게 노조가 무엇인지,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니...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노동인권의 현실을 알린 때가 1970년이다. 그가 노동법을 알려줄 대학생 친구를 간절히 원했던 때에서 무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노동인권은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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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대학? 교육 문제에서 배제되는 특성화고 


대한민국 교육의 귀결은 입시다. 그러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면 사회의 제1 대열에서 낙오한 패배자 취급을 당한다. 인문계가 전부는 아니라고, 요즘엔 공부를 못 하면 다른 길도 있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나름 깨어있는 어른들이 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자기 아이더러 특성화고 가라고 등 떠미는 부모는 거의 못 봤다. 내 문제, 내 아이의 문제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공부 못해서 낙오되는 아이는 절대로 내 아이가 아니어야 한다. 얼마나 그런 사고가 지배적이면 남의 아이 진학에도 대놓고 참견을 한다. 


학교 있는 곳 시내에 가면 교복이 튀잖아요. 상고니까 공부 못해서 가는 데라는 건 기본이고, 그 학교 나와도 쓸모없다, 불량한 애들 가는 데다, 이런 의미의 폭력적인 말들을 들었고요. 실제로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시비 건 적이 있어요. 버스를 탔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어떡하려고 거길 갔느냐, 너네 엄마 고생하는 게 뻔히 보인다면서 왜 상고 다니냐고 하더라고요. (p.209 이은아씨 인터뷰 中)


걱정을 빙자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자연스럽게 더 명확한 차별로 이어진다. 같은 업무를 하는데 고졸과 대졸은 연봉이 다르고, 승진 속도도 다르다. 그러니 점점 더 입시에 열을 올린다. 가방끈이 짧으면 사람대접 받기 어려우니까. 


이런 입시 중심 교육의 문제의식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북서유럽의 교육이 어쩌고 하면서 선진국을 따라가 보려는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학벌주의를 깨지 못하는 데는 견고한 기성세대의 인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할 때, 학교 교육을 생각해요. 그것도 당연하지만, 더불어 부모들이 바뀌어야 해요. 성인들을 모아놓고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직접 발표 수업을 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평생교육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p.93 동준 이모 강수정씨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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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을 하지 않은 게 죄에요 


동준이를 보내고 5-6개월은 아들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다는 강석경 씨. 그러다 “네가 죄인이다. 살인하고 도둑질해서 죄인이 아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데 행하지 않은 게 죄인이다”는 성경 구절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강석경 씨에게 그 선함이란 남을 해하지 않았지만 남의 슬픔과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부족했던 ‘연대의식’을 아들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강석경 씨는 동준이가 떠나기 전에는 (심지어 동준이가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도) 특성화고의 문제점과 기업의 횡포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우리는 어떤가. 나에게 닥치지 않은 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20대 청년이 요양시설에 관한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얼마나 많은 미혼자가 노키즈존을 반대할 수 있을까, 샐러리맨이 쫓겨나는 상가 세입자의 입장을 헤아리는 게 가능은 할까. 당장 내 일이 아니면 크게 관심 가질 확률이 낮다. 시간과 공간, 입장이 다를 뿐 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TV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쁨을 나누는 일은 배우지 않아도 사는 데 무리가 없지만, 슬픔을 나누는 일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강석경 씨를 만나면서 알았다. (p.20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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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집단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공동체는 안정적이다. 그 ‘안정’이라는 공공의 자산은 공감과 신뢰로 만들어진다. (물론 현실적인 정책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자 지금부터 공감하고 신뢰하기 시작하자!” 하면 될까? 작가가 말한 슬픔을 나누는 일은 반드시 배워야만 한다는 데 적극 동의한다. 그 슬픔을 나누며 공감하고 신뢰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 그 길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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