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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나무 Jul 29. 2023

불안을 선택하는 용기 1화

악몽의 시작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에서 전교 1등을 달성한 뒤, 내 인생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돌아가는 꿈이다. 드넓은 서점 수험서 코너에 위로 넘기는 두꺼운 실전 모의고사 문제집들이 쌓여있었다. 책 기둥만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어떤 책이 좋은지 모르겠다. 아니 좋은 문제집을 고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수능이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 와서 이 문제집이라도 풀면 다시 할 수 있을까. 아 참, 수학은 어쩌나. 찍기 운과 실력을 영끌하여 수능 수학을 80점 만점에 78점으로 만들어 놓긴 했지만, 난 이제 그만큼 또 해낼 자신이 없다.

  20대, 30대를 거쳐오며 내 일상은 바뀌어 가는데, 꿈속에서는 같은 때로 계속 되돌아간다. 이미 교대를 졸업하여 교사로 근무 중인데 꿈속에서는 수능을 봐서 교대에 또 가야 한다. 수능 준비가 일하면서도 가능한 것이던가? 아무리 전에 수능을 1등급 맞았다고 해도 공부한 지 5년 10년이 된 내용을 되살릴 수 있을까. 달리는 버스에서 수학 정석을 펴놓고 연습문제를 풀기도 했고, 청소 시간에 책상 위에 단어장을 올려놓고 외우며 책상을 밀기도 했다. 심지어 시험 직전의 기억력이 가장 중요한 중간 기말고사 기간에도 그날그날의 시험이 끝나자마자 하루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의고사를 삼사 등분해서 매일 전속력으로 돌리고서야 내신시험을 공부했다. 그때의 추진력은 낼 수도 없고 내기도 싫다. 공부에 있어서는 쌀알 한 톨만큼의 후회도 미련도 없는 내가 수능을 또 봐야 한다니, 이 지긋지긋한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그날의 꿈도 그랬다. 결혼하고 살림도 하고 직장에 다니며 연년생 두 아이까지 양육하고 있는데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한술 더 뜬다. 이번에 꿈속에서 찾아간 곳은 학교 독서실이다. 개인별 칸막이 책상 몇백 개가 있는 곳에서 가방을 놓을 만한 자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자리도 비어있지 않았다. 공부할 자리도, 교재도 없이 머릿속이 텅텅 빈 채로 시계를 보며 종종걸음으로 빈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렇게 같은 꿈을 꾸는 20년 동안, 나이를 먹으며 고3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면 살수록 꿈이 점점 막장으로 발전해 왔다.



  지이이잉. 알람 진동이다. 새벽 내내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얼마나 노력했던가. 공부는 노력하면 되었지만 잠은 노력해도 와주지 않는다. 피곤해서 제발 잠들고 싶은 간절한 내 마음을 내 몸은 몰라준다. 아직도 채 잠들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그 꿈을 또 꾼 것을 보면 동이 틀 무렵 화장실에 다녀와서 잠깐 잠든 것이 분명하다. 다리가 퉁퉁 부었다. 머리도 아프다. 아이들도 남편도 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 모두 종알거리는 시간, 이젠 나만 남았다. 이불과 이제야 하나가 된 듯한데, 아침 햇살이 원망스러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교실에 들어섰다. 오늘은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까. 수업 중 소리치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이가 있다. 매일같이 복도에 드러눕거나 계단에 숨는다.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달래고 어르고 야단도 쳐보며 데리고 들어온 적도 있다. 담임교사나 보조교사를 밀며 힘으로 버티는 것도 여러 번이다. 초반에 부모님께 알려드려야 하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5분을 예상한 통화는 30분을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그 아이 말고도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하루에도 통화를 몇 통이나 한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행정 일은 잔뜩 밀려있는데 진이 다 빠졌다. 하지만 내일의 수업 준비를 놓치면 안 된다. 준비하지 않으면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처할 여유가 없을 것만 같다. 1교시 교과서와 수업자료, 그 밑에 2교시 자료, 마지막 교시 자료까지 엄선한 후 펼쳐서 다 쌓았다. 아직 알림장 쓰는 일이 남아있다. 꼼꼼한 알림장에 교사의 열성이 드러난다고 믿었다. 복직 후 하루도 빠짐없이 알림장에 올인했다. 수업준비하며 쌓아뒀던 내용을, '오늘 배운 내용'으로 1교시부터 끝 교시까지 상세히 적는다. 아이들과 했던 활동들과 집에 가서 이야기해 보면 좋을 일화들까지, 놓치지 않는다. 아, 매일 읽은 책도 적어줘야 한다. 수업내용과 그림책을 연계해서 하루에 그림책을 한 권 이상 꼭 읽어주는데, 과목마다 어떤 내용에 무슨 그림책을 읽었는지까지 써준다. 책 많이 읽어주는 선생님 참 좋지 않은가? 잘하는 것은 널리 널리 알리라고 했다. 그래서 이참에 내가 읽어준 책을 월별로 알림장에 공지하기로 했다. 3월에 우리 반이 함께 읽은 32권 목록도 날짜별로 상세히 정리해서 학부모님들께 보냈다. 이제야 중한 것들을 마무리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일은 언제 하지? 그래도 나는 제일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했다고 위안하며 퇴근한다.

  복직 후 학교에 오니 정신없고 지치는 일상이었지만 살아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집에서 벗어나 동료 선생님들과 나누는 수다도 재미있었다. 휴직 3년 동안 내일의 걱정도, 아침 알람을 맞출 필요도 없이 편안히 살았다. 하지만 발전이 없는 것 같다는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다. 복직은 그 죄책감을 자연스레 해결해 주며 내 존재감을 일깨워 주었다. 국어와 여름 수업을 그림책으로 시작할 때, 수학 수업을 포켓몬 이야기로 할 때 아이들이 천진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 좋았다. 가만히 앉아있기 어려워하는 장난꾸러기들의 반짝이는 눈은 매일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었다. 자녀를 낳아 키운 경험을 살려 학부모님과 소통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넘어가면 남을 찝찝함이 싫어 학생의 작은 일도 학부모님께 자주 말씀드리곤 했다.

  매일 다음 날을 완벽히 준비하고 알림장도 만족스럽게 쓰니 처음에는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일을 만들기는 쉬운데 없애기는 어려운 법이다. 한번 시작한 일은 중간에 그만두기 어려웠다. 병원에 가야 하는 날도, 자녀로 인해 일찍 나가야 하는 날도 진땀을 빼며 긴 알림장을 쓰고 내일의 준비를 완료하느라 조퇴 시간보다 30분씩, 한 시간씩 늦게 퇴근했다. 동료 선생님들은 왜 아직도 퇴근을 안 했냐며, 일이 그렇게 많냐고 얼른 가라고 하셨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대답을 반복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별 특별한 일도 아닌데, 그저 내가 만들어 놓은 일을 하느라 집에 못 가고 있다니, 점점 스스로가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제출해야 하는 굵직한 일들을 재빨리 처리하지 못한 채, 매일 허둥댔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선생님들이 능력 있어 보이고 부러웠다. 이제 안 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하고 싶었던 일들이 점점 족쇄처럼 느껴져 갑갑했다. 그러면 그냥 안 하면 될 것을, 왜 자꾸 자신을 들들 볶았을까. 인정하기 싫었지만, 불안했다. 학급에서 돌발상황이 생겼을 때 준비되지 않은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그로 인해 겪을 혼란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두려웠다. 닥칠지 안 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매일 완벽하게 준비하느라 나를 갈아 넣은 것이다.

  항상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을 보고 동료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어떻게 1년 내내 하루도 안 빼놓고 수업 준비를 이렇게 열심히 하세요? 너무 대단하세요."

  "선생님 반에는 아무 때나 갑자기 와도 항상 수업 자료가 준비되어 있네요."

  "선생님 반 아이들은 정말 복 받은 것 같아요."

  그러면 나의 대답은 이랬다.

  "저도 이렇게 안 하고 싶은데 안 하면 불안해서 하는 거예요."

  "그냥 하는 게 더 잘하는 건데 전 그걸 못해서 그래요."

  "다른 선생님들은 저처럼 안 하셔도 안정적으로 다 잘하신다는 것을 아는데 저는 그게 안 되네요."

  "이거 한다고 업무가 계속 밀려요. 업무를 며칠째 하고 있어요."

  수업에 아이들과 쓸 악기를 찾아놓고선 자료를 뚝딱뚝딱 수정하여 학년에 쫙 보내놓고 싱글벙글한 내게,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선배 선생님은 이리 말해주었다.

  "선생님은 수업에 진심이구나. 그런데 그렇게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 애들도 선생님도 서로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어. 그러다 진 다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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