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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나무 Jul 29. 2023

불안을 선택하는 용기 2화

반갑지 않은 소식, 우울증

※ 특정할 수 있는 인물을 각색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1년이 흘러 올해 봄,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맡았던 한 아이의 어머님이 올해 학부모회 임원을 맡으시고는, 회의 석상에서 나를 비방하셨다는 것이다. 부분적인 사실에 본인의 추측을 많이 섞어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아이가 교실에서 바지에 소변을 봤는데 담임교사가 네 시간 동안 방치하고서 아이가 이런 일도 경험해봐야 한다고 말했단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이야기인가. 문제의 그날은 바로 입학식 후 첫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교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손가락을 관찰하던 그 아이는 그 시점 분명 소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첫 점심시간, 식판도 못 잡는 1학년 아이들에게 급식 방법 알려주고 혼자 국이며 모든 반찬을 다 떠주느라 내 밥은 먹지도 못했던 그날, 그 아이는 교실에 올라오신 보조 선생님과 함께 나와 선생님의 손을 빌려 음식을 받았다. 그 아이의 먹는 속도가 늦어 다른 아이들부터 급히 집으로 보냈는데, 보조 선생님과 하교한 후 그 아이 부모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아이가 소변 실수를 했다고 말이다. 교실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 대체 그 아이는 언제 실수한 것일까. 어쨌든 입학 첫날부터 소변 실수라니 아이가 많이 곤란해했을 것이다. 아이가 축축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을 텐데 말도 못 하고 답답했겠다며, 담임교사에게 화장실 가겠다는 말은 없었으니 앞으로는 말할 수 있게 해 주시라고, 저도 더 잘 지켜보겠다고 했다. 아이도 이번 일을 경험 삼아 앞으로는 더 잘해나갈 것이라고도 격려해 드렸다. 그런데 아이를 내가 방치했다니. 이런 일도 경험해 봐야 한다고 했다니? 아이 어머님은 회의 석상도 모자라 추후 내 이야기를 하러 교장실에 또 찾아가셔야겠다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이기는 했지만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저 사회성을 키우면 좋을 아이라 아이들과 함께 하는 활동 수업은 1년 내내 죄다 시간표를 바꾸어 그 아이가 활동하기 좋은 시간에 하고는 했다. 매일 하교 시간 아이를 데리러 오는 부모님께는 마치 어린이집 선생님이 된 것처럼 아이의 하루하루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곤 했었다. 다음 담임 학년을 고민할 때 그 아이를 내가 데리고 올라갈까도 고민했었다. 1년간 열심을 쏟은 아이의 학부모님에게 1년도 더 지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일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교무실 선생님께서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아이에 대해 써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야 그 어머님이 교장실로 왔을 때 대처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교실을 매일 탈출하는 아이로 긴장을 놓지 못하고, 다양한 아이들의 일로 학부모들과 통화를 하고 있으며, 알림장과 수업 준비로 나를 갈아 넣고 있는 시점에 굵직한 업무까지, 여기다가 작년 아이에 대한 1년 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니, 과연 언제 다 쓸 수 있을까. 교사인 남편도 비슷한 일로 법적 분쟁 중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교사에게 통하지 않는다.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겠지만 이런 일에 걸려들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학부모나 학생의 일방적인, 악의적인, 때로는 거짓된 신고에도 교사는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기억해 내어 자신의 무고를 입증해야 한다. 분쟁이 언제 끝날지 기약 없이 기다리는 고통, 앞날을 모르는 불안감, 그 누구의 지원 없이 홀로 버티며 싸워나가는 외로움과 버거움, 경제적인 어려움이 우리 가정에 몇 개월 지속되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정신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는 교사가 몇이나 있을까. 자신의 잘못도 아니면서 내게 죄스러워하는 남편에게 나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분명 남편이 미안해할 것이기에 힘들어도 남편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또 시작되려는 것 같다. 그 아이 어머님 성격상 절대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그럼 나는 무슨 이야기부터, 무슨 문장부터 써야 할까. 다 기억나지 않는 일은 어떻게 할까. 이렇게 쓰면 오해받지 않을까. 저렇게 쓰면 될까. 새빨간 눈으로 법적 입증자료를 새벽마다 작성하며 마음 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려고 누우면 새벽 내내 문장이, 그 아이와 학부모 얼굴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잠 못 자고 끙끙 앓는 날이 계속되었다. 나는 미쳐버렸다. 아이 저녁을 챙기느라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는 남편에게 고함을 치며 울었다. 학교에서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아냐고. 이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당신까지 내 이야기를 듣지 않냐고. 그 모습을 일곱 살 딸과 여섯 살 아들이 보고 있었다. 온몸을 감싼 분노와 슬픔과 절망에 방문을 잠가버렸다.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이제 싸울 힘도, 견딜 돈도 없다. 이젠 모든 것을 그만하고 싶다.

  힘들지만 매일 할 일은 많고, 변함없이 정신이 없었으며, 할 일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동료 선생님들께 쉬운 것부터 묻고 또 물었다. 작년에 했던 것들인데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리해도 정리해도 모르겠다. 잠을 며칠째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으니 부쩍 퀭하고 수척해졌다. 몸살처럼 온몸의 관절이 아파서 타자 치기도 어려웠다. 장이 꼬인 듯 배도 아팠다.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동료 선생님들은 조심스레 말했다.

  "선생님, 힘든 상황에서도 학급 아이들을 최우선순위로 놓으시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세요. 몸도 꼭 챙기세요."

  "선생님,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병원에 꼭 가보세요."

  "너무 힘드실 것 같아요. 학교 걱정은 마시고 하루라도 병가를 쓰세요."

 너무 바빠서 병원 갈 시간이 없다는 내게, 한 원로 선생님께서 이건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꼭 병원에 가라고 하셨다. 그래도 가지 않고 일에 매몰되어 있는 나를 병원에 보내기 위해 교감 선생님에까지 다녀오셨다. “선생님 저러다 큰일 나겠어요. 수업하지 말고 지금 병원부터 가라고 교감 선생님이 꼭 말씀 좀 해주세요.”



  금요일 아침, 교감 선생님이 교실 앞에 찾아오셨다. 선생님의 사정을 자세히는 몰랐는데 힘들었겠다고, 힘들면 수업하지 말고 병원에 지금이라도 가보라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 어머님과는 잘 이야기 나눌 것이니 자료는 안 써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교감 선생님의 진심 어린 걱정에 용기를 내어 병원에 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잠 못 자고 힘들어 안 좋은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 아이 어머니가 무슨 짓이라도 벌일까 두려웠다. 계속 참고 견디고만 있으면 힘들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그냥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지 않을까. 힘들면 힘들다고 말도 하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증거로도 남겨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의학과에 방문했다.

  처음 간 정신의학과는 꽤 조용했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점잖아 보였다. 다들 어디가 아파 이렇게 병원에 온 것일까 궁금해하던 중 내 진료 순서가 되었다. 젊은 남자 원장님은 어디가 힘들어서 오셨냐고 물었다. 나는 오늘 진단서를 받기 위해 왔다. 아프고 힘든 것을 최대한 상세히 말했다. 원장님은 힘든 마음에 공감해 주시며 약 처방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원했던 진단서는 줄 수가 없다고 했다. 6개월 이상 진료를 받거나 종합 심리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진단서를 주는데, 그 심리검사도 3주 이상 밀려있으며 검사 결과도 2주는 걸린다고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약을 받아 들고 심리검사 예약을 했다. 집에 와서 열어본 약 봉투에는 이름도 모르는 약이 형형색색 다섯 알이나 들어있다. 꼭 이비인후과에서 콧물약, 기침약, 위장약, 항히스타민제 왕창 넣어주던 것과 비슷하다. 이 약을 먹어도 되는 것일까. 내 정신이나 몸이 더 안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그저 내 말만 듣고 이렇게 많은 약을 처방해 주다니. 앞으로 그 병원을 또 갈 마음은 없다.

  여전히 잠을 못 자 퀭한 토요일 아침, 검색 끝에 극적으로 좋은 곳을 발견했다. 정신의학과를 하는 한의원이 있는데 비교적 진단서가 잘 나온다는 것이다. 전화로 지금 방문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자만 눌러쓴 채 바삐 그곳으로 향했다. 원장님과 상담 후, 여러 검사를 했다. 검사지에는 우울이나 불안을 체크하는 여러 문항이 있었는데, 안 좋은 선택지들이 지금 내 모습과 닮아있어 마음이 아팠다. 컴퓨터로 도형 모양을 이리저리 돌린 것을 보며 같은 모양을 찾는 뇌파 검사를 하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런 기계 검사로 심리를 알 수 있는 것일까 의아하기도 했다. 검사 후 다시 오신 원장님은 결과가 너무 안 좋다며, 수치를 보여주셨다. 문항지 검사를 하면서는 내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충격적인 것은 기계 검사 결과였다. 인지 강도와 인지 속도의 차이가 10 정도 차이여도 심각한데 30 이상 차이가 난다고 했다. 작은 자극에도 뇌가 크게 반응하고, 자극을 인지하는 속도가 늦다며,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라고 하셨다. 원래 내면에 힘이 있으신 분 같은데 지금은 정상 판단 같은 것도 어려울 것 같다고, 분노 수치도 너무 높아서 불안정하다고 했다. 진단서는 원래 바로 안 해주는데, 써드려야겠다며 꼭 치료받겠다고 약속하라고 하셨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아프고 힘들긴 했어도, 실제로 내가 이렇게 길게 진단받을 정도로까지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손에 쥔 진단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수면 유지 및 개시 장애, 중증도 우울에피소드로 3개월간 안정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월요일, 두 달의 병가가 시작되었다. 암막 커튼을 치고 침대에 줄곧 누워있었다. 종일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에서만 눈물이 나면 좋겠는데 겨드랑이에서도, 온몸에서도 땀이 같이 났다. 쓰레기 하나를 봉투에 구겨 넣어도 그 여파로 관절이 아파 며칠 고생을 했다. 배란통이 너무 심해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내 몸 전체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손가락이며 손, 발바닥까지 통증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아침 일정 하나만 있어도 새벽 내내 긴장하여 잠을 자지 못했다. 결국 교회에서 매주 치던 피아노도 쉬게 되었다. 집안일을 할 몸 상태도 아니었고, 바닥에 널린 물건이며 싱크대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평소 먹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아무 음식에도 관심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무서웠다. 학교 아이들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 평소에도 느끼던 부담감이 공포감으로 바뀌었다. 엘리베이터라도 타려면 닫힘 버튼을 다다다다 눌러댔고, 어디서 초등학생의 목소리라도 들리면 얼굴과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몸뚱이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여태껏 우울증은 의지로 극복 가능한 것인 줄 알았다. 최선을 다해 어려움을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살면 그런 증상은 생기지 않는 줄 알았다. 더구나 부모님의 이혼, 매 맞기가 일상이었던 유년 시절, 새 가정으로의 입양 같은 굵직한 삶의 굴곡을 겪고도 이겨내어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는 내가 우울증이라니 이 무슨 약해빠진 이야기인가. 믿기도 힘들고 인정도 어렵지만 몸도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병이 맞다. 잔병부터 큰 병까지 대학병원을 밥 먹듯 드나들더니 끝내 이런 병까지 들러붙는구나. 나는 병에 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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